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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차별은 없다'는 백인학생에게 소리치며…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5)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의 활력소 게일 황(상)

2세 중심돼 이철수 구명위 조직
나중에 범아시아 조직으로 확대
맬컴 X의 자서전 읽고 자신 찾아
그의 경험이 내 인생의 전환점돼


나(이경원)는 한인 타운에서 영어 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소수이지만 북가주에서 한인 이민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한인 2세들을 보았다. 1970년대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을 주도했던 바로 그 2세들이다. 1978년 나는 교육자이며 운동가인 게일 황을 코리안 커뮤니티 센터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코리안 커뮤니티 센터는 한인 2세들인 톰 김, 프랭크 윤, 스티브 손, 톰 서, 크리스 차우 등을 주축으로 설립된 단체다. 게일은 이철수 사건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센터를 찾았고, 곧이어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한인 2세들이 중심이었으나 그 후 범아시안 아메리칸 구명위원회로 확대됐다.

나는 처음부터 한인 이민자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게일의 용맹성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아마 선구자 집안인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게일은 전설적인 3대가 있는 황씨 집안에서 태어나 그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유카탄에서 한국인 노예들을 해방시킨 황사용, 독립운동가이며 목사로 활약한 황사선, 하와이에서 교육자이며 사진신부들을 지켜낸 황하수가 그들이다. 게일은 유카탄에서 자신의 조부모 형제인 황사용이 남긴 유산을 재발견하고 아시안 아메리칸 민권운동의 활력소로 활용했다.



1973년에 한인 3세 게일 황이 유카탄을 방문해 조부모 형제인 황사용 목사가 그곳에서 비밀리에 구출하려 했던 한인 노예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30년 동안 가장 낙후된 지역의 학군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이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데 전력을 다했다. 흑인, 라티노, 아시안계 학생들로 구성된 북가주의 오클랜드 학군에서 학생, 가족, 커뮤니티 서비스국의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또한 학생들의 다문화 교육을 위한 교과과정을 만들어 소수계 학생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커뮤니티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살아온 황 목사 가족들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게일은 바로 그러한 황 가족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녀는 베테랑 수학 교사인 놈 거스너와 결혼해서 크리스, 대니얼, 칼 3남매를 길렀다. 게일과의 인터뷰를 요약했다.

나(게일 황)는 샌프란시스코의 선구자적 한인 가정에서 태어나 선셋 지역에서 자랐다. 컬럼버스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 가족이었고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친구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일주일에 하루 할아버지가 담임 목사로 재직하던 파월 스트리트에 있는 한국 감리교회를 다녔다. 토요일에는 선우 젠, 그의 형 선우 쿡과 함께 한글학교에 다녔다. 젠은 나중에 나의 사촌 브랜다와 결혼했다. 그들의 부모인 선우 소니아와 선우 헤럴드는 우리 부모님의 친구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 서로 잘 알고 지냈다.

상당히 사교적이었던 나는 열두 살 때 총학생회장직에 출마했다. 아버지가 "게일을 뽑으면 그녀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만들어주셨는데 그 덕분에 당선됐다. 나는 학교에서 무척 인기가 있었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이 창피했다. 아이들이 무척 놀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어떤 아이는 내게 "더러운 공산주의 한국인"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부모님들을 교실로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오고 싶어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나는 너무 창피했다. 7학년 그리고 8학년이 되면서 더 이상 아이들이 나를 파티에 초대하지 않았다. 당시 백인들은 아시안들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자신감을 잃었고 내성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나 스스로 소수계에 대한 인종차별과 탄압을 내면화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못생겼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나 스스로 열등하다고 느꼈다. 사교적이었고 학생회장에도 선출되었던 내가 내성적인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교에 진학해서 흑인 혁명가인 맬콤 X의 자서전을 읽고 내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를 맬콤 X와 비교하면서 그의 경험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잠시 동안 나는 부모님을 탓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된 사람은 아닌지 혼돈을 느끼면서 부모님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왜 차이나타운에서 이사했을까?"

"왜 백인 지역으로 이사해서 내가 차별당하게 했을까?"

부모님들이 불필요하게 우리에게 압박을 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웃집에 들어갈 때는 더러운 손으로 벽을 만지지 말고 신발에 모래가 없도록 털라고 말했다. 이웃들은 우리 가족이 옆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것도 매우 힘들었다. 그 당시는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이 있었던 시기였다.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교 다닐 때 일본계 교수가 수업 시간에 인종차별 제도의 영향에 대하여 질문을 했는데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백인 학생이 "나는 교수님의 질문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아시안들은 인종차별을 경험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학생의 말을 듣고 내가 경험했던 인종차별들의 순간들이 내 머리를 스쳐가면서 몹시 화가 났다. 내가 나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열등의식을 갖게 된 것은 결코 부모님들의 잘못이 아니었고, 바로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의식의 변화를 경험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수업 중 손을 들고 백인 여학생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한 경험을 한 후 더 많은 의문들이 생겼다. "왜 우리의 역사에 대해 배우지 않은 것인가? 왜 한국인들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가? 왜 미국이었는가? 여기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미국으로 올 때 초기 이민자들은 무엇을 기대했는가? 왜 코리안 아메리칸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부모님은 생업을 위해 매일 일하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에, 나의 이러한 질문에 답할 시간도 없었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위해 희생했고 저축해서 좋은 이웃 동네로 이사해 아이들이 좋은 학군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미래를 준비하 기에 바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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