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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녀 돼 하와이 돌아와 여성정치운동 시작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4)
한인 3세대 행동파 정치운동의 전설 재키 영(하)

하와이 주하원의원 처음될때
한인 10가구뿐이었지만 출마
가가호호 방문하며 선거운동
김치 만들어 팔며 기금 확보


▶성장하면서 바뀐 게 있었나?

나는 활발한 성격으로 선머슴 같은 소녀였다. 여름에는 골프를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15살이었을 때, 프로가 나에게 자신의 골프클럽의 미스 로터리가 되길 원하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도 내가 라이언스 클럽의 미인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 당시 나는 골프 스윙보다는 외모에 더 많은 신경을 썼었다. 하와이 대학교를 다닐 때 카팔라랄라 미인대회에서 각 민족별로 최고 미인을 뽑았었는데, 그때 나는 한국인 최고의 미인으로 뽑혔다. 그러는 한편, 나는 대학교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정치 캠페인 에도 활발히 참가했다.

20살 때 나는 하와이, 중국, 포르투갈, 독일, 영국인의 피가 섞인 대학 동기와 결혼했다. 물론 나의 가족은 그가 한국인이나 아시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혼을 무척 반대했고, 그를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몹시 애를 먹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선 네 명의 자녀가 생겼고, 세 명의 손자, 손녀를 얻었다. 남편은 졸업 후 미군 장교로 임관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저곳으로 이주하면서 살았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남편은 매우 가부장적인 사람이어서 23년의 결혼 생활 동안 내 의견을 피력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남편과 나는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다투게 되었다. 결혼 후 13년 동안, 나는 집에서 살림을 돌봐야만 했다. 남편이 한국과 베트남으로 파견 나갔을 때 나는 다시 학교에 등록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결국 1978년에 이혼했다.



▶어떻게 진보 성향의 정치인이 될 수 있었나?

하와이를 떠나 다른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여러 사회 이슈에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사회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 또한 갖게 됐다.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질 때 나는 마침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었고, 공산당을 피해 동독에서 피란오는 사람들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1962년에 우리는 조지아주의 오거스타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는 심한 인종차별을 목격하면서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공부를 계속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1960년대 반전운동과 소수계 교수 차별철폐운동 등이 한창일 때, 나는 학업에만 전념했다.

1970년대에 나는 이혼녀가 되어 하와이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는 여성정치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여성정치협회의 지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또한 미 전국여성정치운동 코커스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마 내가 한인 여성으로선 최초로 미 전국 조직의 부회장직을 수행했을 것 이다.

내가 하와이 주하원에 출마했을 때 나의 지역구에는 한국인이 단 10가구밖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 표만으로는 당선되기 힘들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내가 출마하는 것에 상당한 관심을 표명했다. 내가 한국인 최초로 주하원에 출마를 했다고 연일 보도했다. 나의 지역구는 하와이안, 백인, 일본계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지역구를 걸어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상대방 후보는 아주 보수적이었으나, 나는 진보적이었으며 여성의 선택 권리를 강력히 주장했다. 한국인은 별로 없었지만 나는 김치를 만들어 팔아서 1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와이 출신의 정치인으로서 4.29폭동에 대한 생각과 경험은.

LA한인 타운이 불에 탄 날이 바로 하와이 주 의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며칠 후 LA타임스의 일레인 우가 쓴 글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레인은 "한인 상인과 흑인 고객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아시안인 자신이 한국인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렵다"라고 썼다. 나 자신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일본계로 오인받는 걸 두려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 다른 아시안들이 한국계로 오인받는 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폭동이 발생했을 때, 딸 폴라 대니얼은 LA에서 변호사이자 한인 청소년회관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나는 일레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청했고 한인 사회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보려 애썼다. 폴라와 나는 일레인을 만나 왜 그런 기사를 썼는지 물어보았다. 일레인은 '베트남계 가게', '스패니시계 가게'라는 표식이 가게 앞에 붙어 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 한인 가게로 오인받아 흑인들로부터 공격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날 늦게까지 폴라는 한인 타운을 돌면서 일레인이 말한 그러한 표식들을 발견했다. 우리는 약탈당한 상점의 깨진 창 앞에 걸터앉아 보험 처리를 기다리는 주인을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무척 많은 교훈을 주었다. 이후 미국 민권위원회 모임에서 앤젤라 오 변호사를 만났는데,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때 우리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몹시 분개했다. 그렇게 큰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민권위원회 모임에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연구'를 하겠다는 무책임한 발언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업체들은 약탈을 당하고, 방화로 전소됐다. 또한 인종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는 연구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을 할 시기였다. 비록 나는 하와이에서 왔지만, 사업체를 모두 잃어버린 한인 가게 주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하와이의 한인들도 이미 비슷한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 4.29 폭동의 피해자들과 비슷하다고 보였나?

사우스 센트럴에서 사업을 하다가 피해를 입은 한인 여성들의 얼굴 표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UCLA에서 폭동에 대한 포럼이 열렸는데, 거기서 부모가 가게를 운영한다는 학생들을 만났다. 나는 그 학생들과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 학생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대신해서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부모들이 이제 자신의 자녀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저들이 나의 부모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도 손님이 한 명이라도 더 올까 봐 밤 10시까지 가게를 운영하곤 했었는데, 어머니는 하룻밤에 한 명의 손님이 온다면 한 달에 25명이 오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한인들도 민권운동에 관심과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한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민권은 하나의 인종 또는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인들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계, 중동계, 여성 등 모든 차별에 대항해 격분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의 민권을 보호하는 운동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한 집단의 민권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은 인종차별 때문에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은행장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초기 이민자들이 단순히 노동자 또는 자영업자였다고만 생각하는데, 그 당시 초기 이민자들에게 어떤 다른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외할머니가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옷에 수를 놓는 일을 하셨다. 그 일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해야 하는 고된 일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내조를 했고, 외할아버지는 통역관이 되어 이민자들과 사진신부들을 도왔다.

외할아버지는 또한 한인 성공회의 초대 목사였으며, 대한인국민회 회장을 역임했다. 하와이에 도착한 지 20년이 지나 그분들은 와이아와에 세탁소와 하숙집을 구입해 한인 노동자들에게 임대했다. 외할머니는 미군 장교들의 옷을 세탁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세탁소 경영인이었고 외할아버지는 그냥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상공회의소와 라이언스 클럽 등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외할머니가 세탁소를 운영했던 것이다.

▶한인 이민 100주년 및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경험과 역사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와이 한인 사회는 이미 6세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지 이미 100년이 넘었다. 앞으로 타 인종과의 결혼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나처럼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나의 딸 폴라처럼 4세임에도 불구하고 한인 사회에서 활약하는 사람들 또한 꾸준히 배출될 것이기에 희망이 있다. 폴라는 변호사로서 한인 청소년회관에서 일했고, 남가주 아시안 아메리칸 변호사 협회의 회장직도 역임했다. 그 아이는 나보다 먼저 한인 사회 활동에 참여했고, 나보다 훨씬 훌륭하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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