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여성 장벽 뜷고 정치인 '우뚝'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3)
한인 3세대 행동파 정치운동의 전설 재키 영(상)
미 전역 민권운동에 앞장서
주하원 최초 여성대변인 활동
부지사 및 주상원 도전서 좌절
한인 3세 출신의 재키 영이 하와이 주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일일지도 모른다. 재키는 두려움이 없고, 노골적이고, 제약을 받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런 자신의 성격과 유전자에 흐르고 있는 개척 정신을 발판으로 재키는 아시안 여성들이 넘기 어려운 장벽을 뚫고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재키는 어린 시절 하와이의 한인 여성 개척자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여성들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가족을 지켜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인 여성들은 활동적이고 직설적이었다. 우리는 여성들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자랐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도 곧 바로 이의를 제기하고 해결하려 노력했다."
재키는 평생을 하와이 및 미 전역에서 민권운동의 선봉으로 맹활약했다.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행진을 하고, 하와이의 소수민족 보호국장을 역임했다.
1992년 LA에서 폭동이 발생했을 때, 경찰, 정치인, 아시안 아메리칸들 모두 이를 회피하는 것을 보고 재키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녀는 단숨에 LA로 날아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딸인 변호사 폴라 대니얼과 함께 불탄 한인타운을 돌아보면서, 재키는 한인들의 정치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일이 동기가 되어 재키는 미 전역을 돌며 한인 사회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조직 구성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재키는 또한 주하원의원으로서 최초의 여성 대변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96년 부지사 및 주상원의원이 되고자 했던 재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998년에 재키는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헌법에 대항하는 민권운동을 벌이며 투쟁했지만, 이 또한 실패했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자로서의 재키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갔다. 비록 인지도를 얻는 데 실패했지만 재키의 굳은 신념은 거침없는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1998년에 민권운동을 진두 지휘하는 동안 재키에게 유방암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경험을 미국 내 잡지 및 TV 프로그램을 통해 당당히 이야기했고, 하와이 암센터의 특별 배심원으로 일했다.
재키는 여성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하와이 퍼시픽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또한 하와이 한인들에 대한 TV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사운드 오프'라 는 이름의 주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미국시민자유연맹은 이러한 재키의 활동을 높이 사면서 1999년에 '올해의 시민적 자유 옹호자'로 재키를 선정했다. 같은 해 미 전국교육자연맹에서도 재키에게 퓨트렐상을 수여하면서, 그녀가 평생 동안 여성과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힘쓴 공을 치하했다.
하와이 역사가 톰 코프먼은 재키에 대해 근래에 찾기 힘든 "능숙한 정치인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소유한 든든한 기둥"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재키는 정치에 입문한 초기부터 미 전국 여성 정치인 간부 회의에서 의장을 맡았는데, 보수적인 지역구에 출마하여 보수파인 현역 의원을 상대로 당선되었다.
71세때 재키 영은 유방암을 이겨냄은 물론, 수많은 선거전을 치르고 비인기 조직들을 이끌었다. 하와이에 있는 전미 암협회의 고문으로서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자신의 삶에 주어진 시험들에 맞서는 용기, 이것이 바로 재키가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여성운동가이자 민권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암과 싸워 이겨낸 재키는 3세대 행동파 정치운동의 전설로 전해진다.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여러 시험에 용기 있게 맞섰던 재키의 인터뷰이다.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분들은 양반 출신으로, 1904년 8월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외할아버지는 평양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기 전 조선군으로 활동했다.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왕의 필경사여서, 외할머니는 궁궐에서 자수와 요리를 배우며 성장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결혼 후 한국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피해 하와이로 망명했다.
1936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한국을 방문하고자 했지만, 입국을 불허할 거라는 소식이 들렸다. 그분들의 사진이 입국장 세관에 걸려 있어, 입국 즉시 체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20년부터 우리 가족은 부동산과 자영업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나는 외할머니를 무척 존경했다. 외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어머니 마사와 이모 프랜시스, 밀리센트 그리고 삼촌 조셉을 입양해 키웠다.
하와이에 도착한 지 몇 년이 지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마차에 물건을 가득 싣고 여러 사탕수수 농장을 돌면서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했다. 우리 부모님은 처음엔 와이아와에 살았다. 부모님은 오빠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인 1937년에 호놀롤루에 집을 사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며 함께 살게 되었다. 호놀롤루로 이주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대한인국민회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었다.
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무척 가까웠다. 그분들이 어디를 가든지 나를 데리고 다녔다.
외할아버지는 우리를 대한인국민회 모임에 데리고 갔는데, 안에서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밖에서 놀았다. 회의에서는 여성들의 발언도 들을 수 있었다. 여성들도 일어나서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발언하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 가족 또한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고 누구나 말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행동이 당연히 정상이라고 믿으며 자라난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집 밖에서 사업을 운영하면서 열심히 일했고, 실제로 어머니는 10대 때부터 우리 집안 사업의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와이아와에서 시내까지 매일 편도 40km 거리를 운전해 학교를 다녔고, 멕킨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가 192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본토 여행을 약속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네 살이었던 1938년 교사인 제니 김,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제인 임과 함께 미국 본토를 여행했다. 어머니는 인디애나에서 스터드베이커 차를 구입해 미 전국을 돌았으며, 캐나다도 들렀다. 어머니가 두 달 정도 본토를 여행하는 동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 남매를 돌보셨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인들이 주고객이었던 우리 가족의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 우리 가족은 1942년에 아시안으로서는 최초로 부촌에 조지아 스타일의 큰 집을 구입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드렸다. 그때 오빠와 나는 푸나후 학교에 합격했는데, 학비가 무척 비싼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로 유명했다. 그 학교는 아시안 학생 정원을 10%로 제한하고 있었으며, 한국인 학생은 1년에 한 명 정도 졸업했다.
나는 활동적인 소녀였기 때문에, 여자는 부엌일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외할머니와 항상 부딪쳤다. 그런데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 남자아이의 청바지를 사주시며 자유롭게 뛰어놀라고 한 사람도 또한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내가 열두 살 때 외할머니가 일본식 슬리퍼를 신지 못하게 해서 그냥 맨발로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탄압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외할머니가 우리에게 일본식 슬리퍼를 못 신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일본 친구들도 있었고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외할아버지는 항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했는데,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 집은 와이아와에서 가장 큰 세탁소를 운영했다.
외할아버지는 대한인국민회 회장을 역임했지만, 이승만이 이끌던 동지회와의 분쟁으로 화를 입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하와이와 미 본토의 대한인국민회 회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그들의 대한민국 입국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하와이 역사가 장로버타와의 인터뷰에서 재키는 "할아버지가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면 암살당할 거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할아버지는 조국 땅을 밟는 것을 간절히 바랐는데, 끝내 이루지 못했다.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고,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 왔을 때, 할아버지는 이제 조국 땅을 밟을 수 있다고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다 그만 중풍으로 쓰러졌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라고 밝혔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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