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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국서 유학생들 아이 낳을까봐 결혼 금지시켜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2)
3세 여성학자이자 운동가 일레인 김(하)

어머니 첫 결혼서 아들 둘 낳았지만
마취중 잘못돼 하나 잃어 결국 결별
시카고 유학생 아버지와 두번째 결혼
남동생 태어날때 뉴욕 한인들 축하해


어머니는 한국 역사에 대해 잘 몰랐다. 내가 한국과 미주 한인사를 공부하면서 배운 바로는, 1903년부터 1905년 사이에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의 90%는 젊은 총각들이었고, 아주 적은 숫자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함께 이주했다. 또한 아주 극소수의 한인 여성들이 한국에서 기독교로 귀화하여 하와이로 건너왔다는데, 임신한 상태 혹은 갓난아기를 데리고 하와이로 이주한 여성의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할머니가 집에서 무슨 일이 생겼기 때문에 미국으로 도망을 온 듯하다. 당시 한국에서 미혼 여성의 임신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할머니는 하와이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도망치기 위해 미국으로 온 듯하다. 미국으로 이주해 온 초기 또는 근대 한인 이민자들은 매우 용기 있는 선구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피치 못할 사정들이 있어 도망쳐 온 경우들 또한 있다. 할머니는 하와이에서 또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어머니를 고아원에 맡기고 일을 했다. 아마 와이오밍, 몬태나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 듯하다. 어머니는 소풍 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는데, 아마 어린 시절 농장에서 고생했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일 힘든 일은 콩을 수확하는 일이었고, 어머니는 콩 수확 노동을 하면서 쭈글쭈글해진 자신의 손을 제일 싫어했다.

할머니는 한국인 노동자와 결혼했는데, 그가 바로 어머니의 양아버지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한인 노동자들은 총각이었고 한인 여성은 매우 귀했기 때문에, 한인 여성이 있으면 서로 앞다투어 결혼하려고 했다. 어떤 한인 총각들은 어머니에게 성추행 또는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덤불숲에서 갑자기 남성들이 나와서 덤비기도 했기 때문에, 학교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찾곤 했다고 한다.



양아버지가 다른 한인 총각들에게 1~2년 동안 급료를 받지 않고 잡초 뽑는 일을 해주면 어머니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영어 공부와 독서를 매우 즐겼는데 특히 십자말 퀴즈를 푸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오래된 신문의 모든 기사를 정독하는 것도 무척 좋아했고 오빠의 둘째 딸, 그러니까 둘째 조카가 어머니의 이러한 재능을 물려 받았다. 조카는 네 살 때 이미 대학 교재를 읽을 수 있었다.

할머니와 양아버지는 어머니를 이미 한국에서 결혼해 부인이 있는 늙은이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남자는 한인 노동자들을 위한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금세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어머니의 아들들은 나보다 무려 스무 살이 많다. 어머니의 전 남편은 가정 폭력이 매우 심해 때리고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는데 지나가던 미국인들이 그만하라고 만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는 포경수술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위생과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포경수술이 필수였다. 어머니도 의사의 권유로 여섯 살과 여덟 살인 두 아들들에게 포경수술을 시켰다. 그런데 수술 도중 마취약 과다 투여로 한 명이 사망했다. 아마 몸무게에 비해 너무 많은 양의 마취약을 투여해서 불상사가 생긴 듯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어머니의 전 남편은 이에 매우 화가 났고, 이 일로 서로 자주 다투었다고 하는데, 어머니도 지지 않고 전남편에게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아들이 죽은 후 남편이 잠시 부재중일 때, 남편이 없는 집이 참 좋다고 느낀 어머니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마 전남편이 어머니에게 어떤 행동을 또 다시 할지 몰라 어머니는 도망을 친 것 같다. 결국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남기고 남편을 떠났다. 그때 어머니가 어디에 살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중가주의 리들리 또는 다이뉴바였을 것 같은데, 어머니는 시카고로 이주해 거기서 한인 여성 헬렌을 만났다. 내가 헬렌 이모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어머니에 의하면 헬렌 이모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헬렌 이모는 나이가 들어 고아원에서 나와 시카고로 이주했다. 어머니와 만나 두 분은 시카고에서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 곳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상점에서 출납원으로 일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는 매우 적은 수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시카고에 온 한국인들 중 한 명이다. 미국에는 한인 유학생이 약 100명 정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유학생 회장이었다.

헬렌 이모가 아버지를 먼저 알았고 어머니에게 소개했다. 당시 많은 한인 총각들이 어머니에게 접근하여 결혼하자고 프러포즈 했지만 어머니는 다시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유학생들은 당시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결혼해 미국 시민권자 자녀들이 생기면 안 된다고 이민국에서 결혼을 못하게 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해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자, 어머니와 아버지는 뉴욕으로 이주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어머니의 과거를 몰랐다. 일본에 가서 이복형제를 만나고서야 어머니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의 이복형제를 한국으로 데려갔는데 미국 시민이었던 그는 일본의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1940년, 남동생이 태어나기 직전 결혼했는데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뉴욕 한인사회 전체가 축하해주었다. 대부분의 한인 남성들이 총각이었던 그 당시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경사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 사진은 초점이 맞지 않는 몇 장밖에 없지만, 남동생에게는 다른 포즈로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이 있다. 나에게는 생일 파티도 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는 4형제가 있었는데 형제들 중 아버지만 유일하게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국에는 아버지의 사촌 여섯명과 이복형 한 사람이 남아있었는데, 일본의 식민 지배,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경험한 당시의 한국 사정으로는 흔한 일이라고 들었다. 아버지의 형은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딱 한 번 한국에 며칠 다녀간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는 일본 식민지시절 부산역에 폭탄을 터트리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고 들었다. 중국으로 가기 직전 아버지의 형, 그러니까 삼촌은 가족들의 강압으로 결혼했다. 그후 단 한번 한국을 더 방문했고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첫번째 부인이 죽은 후 중국에서 다른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삼촌의 두 번째 부인은 1962년에 이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2003년 나는 중국 천진에서 삼촌의 딸, 즉 사촌을 처음으로 만났다. 한국 정부가 삼촌을 독립 유공자로 선정하자, 중국에 있던 삼촌의 자녀들이 한국에 있는 친인척들에게 연락을 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여동생, 고모는 1940년대 일본에서 유학했다. 그 고모와 고모부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2차 세계대전 후 자발적으로 평양으로 떠났다. 그들에게는 여섯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고모와 장녀는 한국전쟁 중 미군에게 사살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다섯명의 사촌들이 북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남동생은 한국에 남아 부모님을 모셨고, 남한과 북한에서 서로 떨어져 살고 있는 사촌들과는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중국과 북한에 있는 사촌들 또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중국의 사촌들이 한국에 왔을 때, 그들은 중국어 만다린어만 할 줄 알고 한국의 사촌들은 한국어, 나는 영어밖에 못했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내가 한국어를 거의 못함에도 한국의 사촌들은 나에게 매우 친절했다. 중국에서 온 사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 가족 중 내가 유일하게 한국인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사촌들은 모두 한국사람과 결혼했고 나는 영어만 할 줄 알고 내 아들은 백인과 한국인의 혼혈이기 때문에, 친척들이 나를 따돌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듯, 나의 가족들은 나와 아들을 아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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