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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은 영문학 교수가 될 수 없었던 시대에…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1)
3세 여성학자이자 운동가 일레인 김(중)

영어 유창 칭찬 많이 받았지만
"언제 한국 돌아가냐"로 귀결
어머니는 코넬 입학허가 받았으나
대학원 등록금 없어서 진학 포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에도 주변에 한국 학생은 없었다. 그때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온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어울렸다. 집에서는 한국계 엔지니어 남성과 결혼할 것을 종용했으나, 나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들은 나와 맞는 좋은 한국 남편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오빠와 결혼을 원하고 할 수 있는 한국 여성은 꽤 많았다. 오빠는 키도 컸고 하버드 대학교를 스무 살 때 졸업한 데다, 24세 때 의대를 마친 수재였다. 당시에는 한국의 부유층 자녀들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그들은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 휴일에 우리 집에 놀러 왔기 때문에, 오빠는 한국말을 못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신붓감을 만날 수 있고 고를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아버지가 내게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는 남학생을 추천했으나, 그 학생과 부모들은 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남학생은 다른 여성과 결혼했고, 이제 나와 결혼할 수 있는 한국 남성이 아예 없었다. 나도 그 남학생을 '너드'라고 생각해 처음부터 별 관심이 없었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아들들에게 서양 문명을 배우게 했으나, 딸들이 서구화되는 것은 반대했다. 남학생들은 전통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부인들이 자신들을 내조해주길 바랐 던 반면, 여학생들은 단지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번듯한 직장에서 성공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상반된 태도 때문에 자녀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23세의 나이로 한국에 갔을 때가 바로 결혼 적령기였다. 그런데 한국 나이로는 24세 또는 25세로, 1960년대 당시 한국에서는 이미 결혼 시기를 놓친 노처녀로 취급당했다. 한국의 친척들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나 좋은 신랑감을 찾지는 못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남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나 자신이 남자를 만나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중매에 대해 잘 몰랐다. 더구나 한국에서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딸 중매에 어머니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도 잘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1903년쯤 한국에서 출생한 후, 갓난아이 때 할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왔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잘 몰랐고, 예순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동양인 차별법 때문에 쉰이 다 될 때까지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었고, 투표 또한 할 수가 없었다. 만약 어머니가 미국에서 출생했다면 법으로 아시안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한국에서 온 아버지와 결혼했다면 어머니는 시민권을 박탈당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한국 이민자와 결혼해서 미국 시민권을 박탈 당하면, 또다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1926년에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온 아버지에게 취업과 결혼은 모두 불법이었다. 당시 아시아 유학생들이 미국에 체류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취업과 결혼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정식 취업 허가 서류가 필요 없는 중국 식당에서 일하면서 겨우 돈을 벌 수 있었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중 비로소 미국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노골적인 동양인 차별이 합법이었던 시기였기에 백인들은 아시안들이 없어지길 바란듯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해 미국에 완전 동화된 아시안들까지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취업에 있어서도 차별의 대상이었다. 백인들은 우리에게 아시아로 돌아가라고 했다.

내가 어릴 때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영어만 할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영어를 아주 잘한다며 칭찬했다. 그리고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당시 나는 한번도 외국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나는 읽을 줄 알았고 문법, 쓰기, 읽기 그리고 독해 등을 매우 잘했다. 초등학교 때 내가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중간 성적밖에는 받지 못했는데, 아마도 내가 동양계였기 때문에 채점에 차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선생님은 나를 단지 외국인으로 취급했고, 그래서 아마도 내가 영어를 전공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컬럼비아 대학원에 다닐 때 한 교수가 학기 내내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교수는 내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절대로 미국에서 영문학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이방인'이기에 영문학을 가르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암시했던 것이다. 내가 23세 때 1년 동안 서울의 친척 집에 머물고 생활하면서, 오히려 미국 사회와 부모님의 관점, 그리고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깨닫게 됐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1년은 내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재미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우 불편했고 고통스럽기까지했다. 한국어를 잘못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항상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드는 듯 한 느낌이었다. 또한 항상 혼자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도 한국어를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머리가 자주 아프기도 했는데, 누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하고 재빠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생긴 두통이었고 가끔은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13세 이후 외국에서 생활하고 외국 문화를 하루 종일 접하는 일은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서 겪은 고통은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들이 매일 접하는 스트레스보다 심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 이민자들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 자신도 조금 경험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몬태나에서 이민 노동자로 일하면서 성장했는데, 겨우 8학년만 마친 상태에서 부모님이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어머니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쳤고 나중에 아버지를 만났다. 어머니는 2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운트 홀리 요크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1938년에 졸업했다. 코넬 대학교 대학원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등록금이 없어 포기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아주 작은 체구로 젊게 보여 2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에 다닐 때가 인생의 전성기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도 그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평화롭고 조용하며 외진 곳에 캠퍼스가 있었다. 아마 어머니에게는 그동안의 고생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면서 고즈넉히 보낸 대학 시절의 시간들이 매우 좋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와 결혼한 후, 중국 유학생의 석사학위 논문을 대필해 편당 200 달러를 받으며 돈을 벌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가 100% 한국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1903년 갓난아이 때 미국에 건너왔고 아버지가 1901년에 출생했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두 살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정확한 생년월일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지어낸 생일이었다. 출생증명서가 없는 어머니가 만들어 낸 생년월일인 것이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가 갓난아기였을 때 너무 자주 우니, 할아버지가 담요를 덮어씌워 울음을 그치게 하려 했다. 이미 자녀들 몇 명이 죽었고, 갓난아기마저 죽을 것이 두려워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떠나 아기와 함께 하와이로 도망쳐왔다. 할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이 갓난아이를 데리고 도박하는 남편을 떠나 영어도 전혀 못하는 상태로 하와이로 도망쳐 왔다는 것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아이를 위해 도망쳐 왔다는 것이 할머니의 설명인데, 어머니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믿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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