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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우월주의'에 맞선 한인 여성운동가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0)
3세 여성학자이자 운동가 일레인 김(상)

학계에서도 뛰어난 업적
대통령 여성자문위원 활동


1942년 일레인 김은 어둠이 짙게 깔린 미국에서 출생했다. 당시는 한국계 2세 들이 거의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흔히 중국계나 일본계로 오인받던 시절이었 다.

그녀는 여성운동이 시작되기 전, 이민 2세대 여성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일레인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모두 남편들로부터 도망친 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로운 삶을 꾸려가야 했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먼 길을 떠나왔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도시로 먼 여정을 떠났다. 그들은 그 당시 여성이라면 자기의 삶이 없이 오직 일만 했던 남성 우월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 일레인은 이런 남성 우월주의와 농노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던 한인 3세대 여성학자이자 운동가였다.

김일레인은 한 많은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러한 삶의 이력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시안 아메리칸 역사와 문학비평, 아시안 아메리칸 연구,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과 아시안 아메리칸 이민자 여성운동, 다큐멘터리, 학문 연구와 행정 등의 분야에서 일레인은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

한인 3세인 그녀는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글로리아 스타이넘,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운동가 헬렌 지아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레인은 "나는 그 시기에 태어난 것이고, 나보다 먼저 태어났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내 세대에는 아시안 아메리칸 민권운동을 주도했던 헨리 더 또는 데일 미나미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들과 동등한 위치이기를 바라지만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을 많이 했다"라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췄다.

UC버클리에서 대학원 부학장을 역임한 일레인 김 교수는 아시안 아메리칸학과에서 1974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시안 아메리칸 연구 학과장과 인문학 부학장, 그리고 총장 여성 교수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김 교수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그리고 UC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보스턴 매사추세츠 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받기도 했다. 김 교수는 아시안 아메리칸 문학에 대한 최초의 책을 저술했으며, 아시안 아메리칸에 관한 여러 권의 책들을 공동 집필했다. 록펠러와 풀브라이트 연구 기금도 받았으며, 클린턴 대통령의 여성역사기구 자문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아시안 아메리칸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아시안 이민자들을 위한 여러 비영리단체를 공동 창립하기도 했다.

일레인 김교수와 1987년 서울에서, 그리고 2003년 미국에서 두 번 인터뷰 할 수 있었다.

나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42년 뉴욕의 워싱턴 하이츠(169가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국을 매우 위험한 곳이라 생각해 항상 두려워했고 불안해했다. 우리에게 떨어지면 위험하다고 나무에 올라가지 말라, 또는 롤러스케이트를 타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옆을 잘 살펴보고 조심하라고 주문을 외우듯 말했다. 뉴욕에 살 때 우리에게 항상 집 안에 있으라고 해서 집 안에서 자전거를 탔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갓난아이 때 할머니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각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각각 다른 캠프에 살도록 하는 분리정책이 실시되고 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서부로 이주했을 때에도, 소수민족들은 절대로 백인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어머니는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학생이었다. 1926년 동양인 이민 금지법이 통과된 후, 아버지는 학생 비자 신분으로 미국에 와서 2차 세계대전까지 학생 신분을 유지했다.

부모님은 뉴욕의 한인 교회에 다녔으며 평생을 한국 사람들하고만 사귀었다. 당시 뉴욕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가 다 알고 지내는 조그만 공동체였으며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한국 총각들이 우리집에 와서 식사를 한 기억이 있다.

우리가 메릴랜드로 이사한 후 학생들과 한국 망명가들 중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고향이 그립고 생각이 날 때면, 우리 집에 종종 놀러 왔다. 어머니가 해주는 한국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1950년 6월 25일, 부모님이 아주 늦게 일어난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단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한국전쟁 소식을 관심 있게 들었고 매우 걱정했다. 1950년대 한국 피란민들이 우리 집에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중 한 가족의 딸 이름이 무해(전쟁 반대)였다. 우리 집은 방 두개로 작은 집이었지만, 항상 한국인들로 붐볐기 때문에 어떤 날에는 걸어다닐 틈이 없을 정도로 침대를 펼쳐놓기도 했다.

어머니는 항상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했다. 어머니는 겨우 79파운드의 가냘픈 몸매였지만 강단이 있었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빠르게 움직이고 말하는 편이었다. 어머니는 부엌이 아니면 열심히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더러운 옷을 챙겨 지하의 세탁기로 옮겨 세탁을 하고 뒷마당에서 그 옷들을 말리곤 했다. 남자들이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할 때는, 대부분 거실에 모여서 주로 정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하루 종일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했다.

아버지는 이승만을 지지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에서 경제 고문으로 일했다. 하와이 출신의 산부인과 의사인 양유찬이 주미 대사로 임명되기 전까지 아버지가 대리 공사로 일했으나, 새 대사가 부임한 후 아주 낮은 직분을 제의하자 대사관을 떠난 것 같다. 아마도 대사관내에서 다른 사람과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아버지는 텍사스에서 목화를 사서 한국 섬유 공장에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1989년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한국인들이 배우지 못해 자치 능력이 없다고 믿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아버지는 믿었다. 할아버지도 교육을 많이 받고 과거 시험에도 합격한 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읽은 많은 책들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분열을 조장하고 폭력을 휘두른 독재자로 강하게 비난받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에 정착하기 전에는 한국 사회와 동떨어져 살았다. 자라는 동안 한국인 친구는 없었고, 대부분 백인 친구들과 사귀었다. 인종차별이 심하던 1950년대에 소수계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치어리더가 됐다.

이는 모든 학점을 A 받는 것보다 더 힘들었고, 복권 당첨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는 유대인 여학생들도 치어리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그때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홍콩에서 온 중국계 학생이 두 명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되게 들리겠지만 나는 당시 학교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뽑혔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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