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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선 김영옥, 하늘에선 프레드 오 다"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48)
아이다호 시골 소년의 꿈 프레드 오(상)

친구따라 시험장 갔다가
조종사훈련 받고 파일럿 돼
150회 이상 출격해
2개의 은성 무공훈장 받아


어어린 시절부터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프레드 오는 스무 살이 되던 해 2 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유럽 전선의 하늘을 날았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많은 한인 2세들이 미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했다. 가난과 끝없는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 부모들이 그토록 바라던 한국의 독립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영옥이 미 육군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면 하늘에서는 프레드 오 가 맹활약했다. 오리건 출신 프레드는 여섯 대의 적군 비행기를 격추시키면서 단번에 에이스로 등극했다. 에이스는 최소 다섯 대의 적기를 격추시켜야 얻을 수 있는 영예이다.

그는 150회 이상 출격한 베테랑 에이스로 두 개의 은성무공훈장을 비롯해, 총 18개의 메달을 받았다. 오 소령의 비행대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유럽 전선으로 이동해 폭격기가 적지로 날아가 공격을 퍼부을 수 있도록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프로이에스티에서 돌아오는 도중 동료가 독일군 비행기의 공격을 받자 끈질기게 추격해 격퇴시키는 용맹한 행동을 펼쳐 보였고, 이로 인해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당시 오 소령은 유일한 한국계 미공군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현재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프레드 오의 공로는 미국에 대한 애국심을 최고로 보여준 훌륭한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그동안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영화와 책을 통해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해왔다. 그러나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젊은 백인들이 주인공인 영웅기일 뿐이다. 물론 오 소령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 르지 않다. 아이다호 소작농 출신으로 미군에 입대해 영웅이 된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오 소령의 이야기는 관심 밖에 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미주 한인 2세 프레드는 미국을 위해 싸운 몇 안 되는 동양인 출신의 영웅으로 그의 이야기가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오프레드 오는 1919년에 태어났는데, 오리건에서 두 번째로 출생한 한인 2세였다. 누나는 일찍이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기 때문에, 여섯 살 어린 여동생 한 명만 있다. 프레드의 아버지 오완주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장인과 함께 1890년 초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들은 알래스카의 연어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에 처음 왔다가, 워싱턴 주 벌목 공장으로 이동했다. 프레드의 어머니 박완다는 남편과 친정아버지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으며, 총 다섯 번에 걸쳐 한국을 오가면서 가족 모두를 미국으로 이주시켰다. 모두 모인 프레드의 가족은 처음에 오리건주에서 지냈다. 그 이후 좀 더 좋은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아이다호 주로 이주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1938년 프레드 오는 큰일이 터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20세에 미 예비군에 입대했다. 와이오밍의 프랜시스 워런 군부대에 배치된 그는 포병부대에서 라디오 통신 상사로 복무했다. 그러다 공군 입대를 희망하는 친구의 시험장에 우연히 따라갔고, 결국 애리조나에서 조종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되었다. 1942년 모든 비행 훈련을 마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파일럿이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프레드는 얼굴이 적군, 즉 일본인과 같아 보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군에 입대한 아시안 아메리칸은 물론,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장래가 엇갈렸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고, 미주 한인들은 적군인 일본인이 아니라고 끝없이 미국인들을 설득해야 했다. 게다가 프레드는 미군에 입대하자마자 인종차별을 겪어야 했다. 물론 그가 만약 일본군에 잡힌다 하더라도 한국인인 프레드는 처형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이 때문에 프레드 오는 태평양 전선이 아닌 아프리카와 유럽 전선으로 보내졌다.

프레드는 1946년 결혼했다. UC 버클리와 노스웨스턴 치과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에서 치과 의사로 일하다가 은퇴한 후 현재 시카고 교외에 살고 있다. 2001년 프레드 오와 인터뷰가 진행됐다.

나는 오리건에서 태어났으나 아이다호에서 성장했다. 우리 가족은 아이다호에서 농장을 운영했는데 주로 딸기, 양파, 수박 등을 재배했다. 하루 일과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농장 일이 전부였다. 아이들도 일을 해야 했다. 그 당시 아이다호에는 한국인이 별로 없었다. 학교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다니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거의 매일 백인 아이들이 나를 때리고 괴롭힌 것이 기억난다. 백인 아이들이 나를 조롱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피해 다니거나 숨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백인 아이들에게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인종차별법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과 싸울 수도 없었다.

근처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지만 그 아이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일본인들이 나를 일본 학교에 보내라고 우리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아버지는 그들에게 화를 내며 절대 나를 일본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는 일본 정부가 체포하려는 망명한 정치범이었다. 1930년대 중반 쯤 일본에서 누군가 찾아와 아버지 농장에서 쓸모없는 농기구를 사가겠다고 했었지만 아버지는 거절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왜 처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나중에 보아라. 저 쓸모없는 금속들이 우리 젊은이들을 죽음에 몰아넣을 것이고, 그들은 시신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 말이다"라고 대답할 뿐이 었다.

왜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군에 입대했는가?

나는 전쟁이 곧 터질 것이라는 조짐을 느꼈다. 미국 정부가 곧 징집을 할 것이고, 미리 입대해서 훈련을 받으면 전쟁 중에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구와 함께 와이오밍 주 방위 군의 라디오 통신 상사로 입대했다. 몇 년 후 친구가 공군 시험을 보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친구가 내가 함께 가지 않으면 자신도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하는 수 없이 따라갔다. 친구가 시험을 보러 먼저 들어갔는데, 비행 잡지가 눈에 보였다. 나는 사실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 잡지를 들고 열심히 읽다보니 시험관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갑자지 내 눈 아래로 군화가 보였다. 눈을 들어 쳐다보니 어떤 대령이 보였다. 대령은 공군 입대 신청서도 작성하지 않은 나를 신체검 사실로 데리고 갔다. 신체검사가 끝나고 대령은 나의 팔을 잡으면서 "빨리 네 짐을 챙겨라. 너는 곧 비행학교로 갈 것이다"라고 재촉했다.

그렇게 나는 애리조나의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비행 전투병으로 투입됐다. 나는 한국계이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솔직히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

나 또한 다른 한국인들처럼 일본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선에 투입해달라는 나의 요청은 거절당했다. 만약 내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일본군이 내가 한국인임을 알게 될 것이고 나를 즉시 처형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유럽 전선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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