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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녀들은 꼭 한국어도 잘했으면” …‘이황 아카데미’ 설립 주도 리자 박 변호사 인터뷰

로스쿨 졸업 후 15년 CBS 앵커, 변호사 병행
한인 없는 곳 나고 자라 한국어 아쉬움 있어

“한국어 한곳만 가르쳤어도 나서진 않았어”
이공계에 예술 접목한 전인교육 기관 목표
 

한국어 영어 이중언어 차터스쿨 ‘이황 철학예술과학 아카데미’ 설립 노력을 주도하고 있는 변호사 리자 박씨는 한인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앨라배마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로스쿨 졸업 후 플로리다에서 15년간 뉴스앵커와 변호사 일을 병행하며 활약했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늘 따라다녔고, 자신의 자녀는 반드시 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가르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4년 전 전국에서 한인이 세번째로 많다는 애틀랜타에 이사를 온 뒤 그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단 한 곳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이중언어 몰입교육(DLI)은 전국적 추세이고, 벅헤드에는 의무적으로 3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지만, 한국어는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도 가르치는 학교가 한 곳도 없다. 내 아이는 한인인데 중국어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1970년대 앨라배마 남부 도탄에서 태어났다. 그보다 3살 많은 언니는 집에서 한국어만 사용한 뒤 킨더가튼에 입학할 당시 영어를 할줄 몰랐다. 박씨는 “당시 교사들은 영어를 못하는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랐고, 언니를 반기지 않는 내색이 분명했다고 한다. 그 뒤 부모님은 집에서도 내게 영어만 사용하도록 가르치셨다”고 말했다.

당시 많은 한인 부모들의 교육관도 비슷했다. 그는 “1970년대에는 영어 외 언어를 사용하는 아이들도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영어에만 집중하도록 지도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12세 아이들의 언어습득능력과 다중언어 구사가 두뇌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가 알려지며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처럼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 한인 2세들 대다수가 한국말을 못하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타고난 사교성으로 늘 친구가 많았지만, 한인이 없는 지역에만 살았다.

플로리다주립대학(FSU)에서 백인들만 속해있던 소로리티 회장을 맡고 영문학을 마그나 쿰 라우드로 졸업할만큼 출중했지만, 늘 한국어를 잘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따라다녔다.

같은 대학 로스쿨 졸업 후 그는 꿈꿔왔던 뉴스앵커가 되어 플로리다 주도인 탤러하시에서 15년간 일했다.

그가 일하던 CBS 탤러하시 방송국은 주청사 건물에 입주해 있었고, 2000년 대선 재검표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활약했다. 지금은 현재 애틀랜타의 상해전문 법무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박씨는 “나는 변호사이지 교육자가 아니고,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다. 애틀랜타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한 곳이라도 있었다면 그 학교에 아이를 보냈을 것”이라며 “한국어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데, 누군가는 반드시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 상의를 드렸고, 좋은 생각이라며 용기를 주셔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황 철학예술과학 아카데미’를 이중언어 교육 뿐 아니라 이공계 교육(STEM)에 예술을 접목한 ‘STEAM’ 인증학교로 운영할 예정이라며 “한인 학부모들의 학구열과 21세기 한국어의 경제적 가치를 고려하면, 어느 학교에도 뒤치지 않는 전인교육 기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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