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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의 참화를 기억하라 '게티즈버그'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미국의 역사는 동부해안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영국 식민통치를 청산하고 서부로 영토확장을 해가는 과정이었다.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짧은 역사에도 수많은 전쟁 유적지를 접할 수 있다. 서부는 아메리칸 인디언과의 전쟁터가 곳곳에 있고 동부와 남부에는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남북전쟁에서 가장 격렬했고 남부연맹이 패망하게 되었던 결정적인 전투가 게티즈버그 전투다. 게티즈버그는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주 경계에 위치한 인구 7655명의 소도시다. 이곳에는 링컨이 연설한 전몰자들의 묘역인 게티즈버그 국립묘지(Gettysburg National Cemetery)와 게티즈버그 전투지역이 국립군사공원(Gettysburg National Military Park)으로 조성돼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게티즈버그는 엄청난 인명이 희생된 곳답지 않게 평화로워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과 들판이 펼쳐진 전형적인 미국 동부의 농촌이다. 하지만 게티즈버그를 중심으로 사방 팔방으로 뻗어나간 도로들은 워싱턴DC,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등 크고 작은 도시와 최단거리로 이어져 있기도 하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 사이에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양쪽 7000여 명의 전사자와 3만2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1만2000여 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된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2일부터 7월 4일까지 3일간 벌어졌다. 남부군은 1862년 겨울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역전을 노리던 로버트 리 장군은 적극적 공격으로 워싱턴 북쪽 외곽을 포위하려 했다. 수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북부군을 압박해 남부의 독립 강화조약 체결을 노린 것이다.

리 장군은 1863년 봄 대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4월 27일 챈슬러빌 전투에서 남군은 북군 최정예로 알려진 포토맥 군단을 대파했다. 남군은 북진을 계속했고 링컨은 방어에 연방의 운명을 걸었다. 드디어 7월 2일 남북의 대군은 게티즈버그에서 맞닥뜨렸다.

양측 병력은 남군 7만 5054명, 북군 8만 3289명이었다.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승리의 여신은 북군 편이었다. 7월 4일의 묘지능선 전투에서 남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포토맥 강을 넘어 황급히 버지니아로 퇴각했다. 3일간에 걸친 백병전이 끝났을 때 게티즈버그의 평온하던 들판은 주검으로 가득 메워졌다.

전쟁의 참화는 남북을 떠나 사람들 모두에게 심한 정신적 충격을 안겨줬다. 게티즈버그에서 전몰자들을 위한 묘지와 충혼탑이 건립됐고 4개월 후인 1863년 11월 19일 링컨은 헌납식에 참석해 추도 연설을 했다.

"세계는 여기에 쓰러진 용사들이 이곳에서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싸운 사람들이 훌륭하게 추진한 미완성의 사업에 몸을 바쳐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살아 있는 우리입니다. 그 대사업이란 명예로운 전사자들이 최후까지 온 힘을 다해 싸운 큰 뜻에 대해 우리가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이들 전사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맹세하는 것, 이 나라를 하나님의 뜻으로 새로운 자유의 나라로 탄생시키는 것,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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