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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스토리] 양극화 시대의 그림, 이삭줍기

문 소 영 / 코리아중앙데일리 부장

지금 서울 예술의 전당에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날아온 '이삭줍기'가 걸려 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옛 이야기처럼 익숙하고 정답고 그만큼 뻔하기도 한 명화. 하지만 1857년 장 프랑수아 밀레가 이 그림을 발표했을 때, 평론가들은 이 온화한 그림이 '위험하고 선동적'이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졸저 '그림 속 경제학'의 몇 구절을 인용해본다.

"일단 이삭 줍기라는 테마 자체가 당시에는 심상치 않게 받아들여졌다. 먼 옛날부터 추수가 끝난 뒤에 이삭을 줍고 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농지가 없어서 주운 이삭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최하층 빈민이었으니까. 밭 주인이 추수 때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고 이런 사람들을 위해 그냥 내버려두는 게 일종의 원시 사회보장제도였다. 그러니 밀레의 그림 속 여인들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서 품을 팔고 품삯으로만은 모자라 이삭을 줍는 가난한 아낙네들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굽힌 등 너머로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이 문제였다. 거기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풍요롭게 빛나는 곡식 낟가리들과 곡식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 그들을 지휘하는 말 탄 감독관, 즉 지주의 대리인이 있다. 반면에 여인들은 기울어진 햇빛을 등지고 서서 어둑어둑해지는 밭에서 자잘한 이삭을 찾고 있지 않은가. 이 조용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대조야말로 빈부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고 당시 비평가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이건 과민반응이었다. 밀레는 그 자신과 동료 화가들이 밝혔듯 정치적이기보다 종교적인 화가였고, 그가 나타내려 한 것은 농민의 노동에 대한 애정과 존경, 자연에 대한 서정이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그는 현실도피나 감상주의에 빠지는 화가가 아니어서, 그가 직접 체험한 농민의 고된 현실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 온화한 화면에 깃든 한 줄기 예리함이, 19세기 중반 사회 갈등이 폭발하던 프랑스에서, 보수적 평론가들을 불편하게 하고 빈부격차 문제를 제기하던 사회 운동가들을 열광하게 했던 것이다.



뛰어난 고전은 시공간을 초월해 담론을 낳는다. 지금 서울에 온 '이삭줍기'를 보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최근 통계청의 '3분기 가계동향' 발표를 보니 상위 20%와 하위 20% 간 소득 격차가 다시 악화됐다. 게다가 최순실 게이트는 10월 말 중앙선데이 헤드라인의 표현대로 '노력하면 성공하는 나라'에 대한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지금 한국의 정치는 거기에 어떤 답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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