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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18> 인류 최초의 부부싸움은 어떻게 생겼을까(상)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선·을 구분 짓는 선이 뭉친 결과가 에고
내 '원수'에게도 축복하고, 기도하라 말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2000년 전 예수는 실제 이렇게 기도했다. 갈릴리의 들과 산, 예루살렘의 시장통, 올리브산의 방앗간에서 예수는 무릎을 꿇었을 터이다. 두 손을 모은 채 이렇게 읊조렸을 터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속성이 땅에 있는 저희의 속성이 되게끔 해 주소서. 그게 바로 예수의 기도였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일. 그게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예수는 실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법'까지 일러주었다. 하늘이 땅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그 중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누가복음 6장27절)다.

사람들은 갸우뚱한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늘에서 이룬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그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리고 이렇게 추측한다. "아! 맞아.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싸울 일이 없겠지.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겠지. 그러니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셨겠지.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래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을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물음표가 하나 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왜 싸우지 않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간단하다. 나에게 좋으면 '선(善)'이고, 나에게 싫으면 '악(惡)'이다. 내게 잘하는 사람은 '선인(善人)'이고, 내게 못하는 사람은 '악인(惡人)'이다. 우리가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항상 '나'이다. '나의 이익' '나의 철학' '나의 잣대'다. 그걸 기준으로 이쪽은 선, 저쪽은 악이 된다.

아담과 이브도 그랬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에덴동산에 선악은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선도 몰랐고, 악도 몰랐다. 에덴동산은 그런 곳이었다. 선과 악으로 쪼개지지 않은 '온전한 곳'이었다. 그래서 낙원이었다. 선악을 나누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다. 그러니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부부싸움도 없었을 터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비로소 '인류 최초의 부부싸움'도 벌어졌을 테니까.

한마디로 '선 긋기'다. 내 마음의 선 긋기. 그로 인해 '이쪽과 저쪽' '좋고 나쁨' '선과 악'이 생겨난다. 그렇게 그은 선이 수십 개, 수백 개가 뭉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다. 철학적인 용어로 그걸 '에고'라고 부른다. 그렇게 그어 놓은 숱한 '선(線)'들이 뭉친 게 에고다. 그 선들이 에고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그 선(線)을 지우려면 말이다. 그 선을 지워서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야 우리가 '에덴 동산'을 만날 테니까 말이다.

원수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은 '마음의 선'에 의해 원수가 생겨난다. 그 선의 이쪽은 아군, 저쪽은 적군이 된다. 나를 살리려 하면 아군이고, 나를 죽이려 하면 적군이다. 그 중에서는 그냥 원수가 아니라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아군보다 적군을 더 자주 생각한다. 그렇게 떠올릴 때마다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긋는다. 선은 갈수록 굵어지고, 갈수록 깊어진다. 그래서 원수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그럼 예수는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예수에게 주목했을 사람들. 저마다 가슴에 선을 긋고, 저마다 마음에 원수를 품었을 사람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누가복음 6장28절)

쉽지 않다. 누가 선뜻 그럴 수 있을까.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을 하라니 말이다.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키지도 않는다. 누구 좋아라고 그렇게 해야 할까. 저주에 저주를 거듭해도 시원찮은 데 축복을 하라니. 나를 학대하는 놈에게 기도를 하라니. 그게 대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예수는 한 술 더 떴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누가복음 6장29~30절)

듣고만 있어도 분통이 터진다. '뺨 맞은 것도 억울한데, 다른 쪽 뺨을 내밀라니''겉옷까지 빼앗겼는데, 속옷까지 내주라니.'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겠다. 설득력도 없다. 그저 좋은 말만 늘어놓는 성인의 '공자왈 맹자왈'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는 이 말끝에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누가복음 6장35절)

이 말을 듣는 순간, 감정의 파도가 착 가라앉는다. 그리고 물음이 올라온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그리스어로 'hupsistos(훕시스토스)'다. '가장 높은 존재'란 뜻이다. 'huios(후이오스)'는 '아들(son)'이란 말이다. 그리스어로 'huioi hupsistou(sons of Most High)'는 '가장 높은 존재의 자식들'이다. 예수는 그렇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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