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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15> 예수는 왜 하느님을 ‘아빠’로 불렀나 <하>

타인의 허물을 용서하면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내 속의 앙금을 털어내고
'텅 빈 마음' 상탣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가 올 수 있어

주기도문 교회에는 특별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 있다. 2000년 전 예수가 몸소 기도를 한 곳이다. 그곳으로 갔다. 번듯한 건물이 아니었다. 반지하 동굴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도 바닥도 벽도 돌이었다. 그런 바위굴이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이스라엘 땅에서 그런 굴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서늘해진다. 그러니 햇볕을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예수와 제자들도 이 공간에 머물렀다.

바위굴 안쪽에 눈에 띄는 공간이 있었다. 철문으로 출입은 제한돼 있었다. 그 안쪽이 바로 예수가 기도를 한 장소였다. 창살 틈으로 카메라를 넣었다. 줌을 당겼다. 아주 작은 방만한 크기였다. 예수는 거기서 '주님의기도'를 가르쳤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복음 6장9~10절)



예수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를 썼다. 당시 아람어는 유대인의 공용어였다. '주님의기도'에서 예수는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람어로 "압바(Abba)"라고 불렀다. 유대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말로 치면 "아빠"쯤 된다. 예수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예수가 기도했다는 바위굴에서 눈을 감았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을까. 그건 친근하기 때문이다. 친근한 게 뭔가. 가까운 거다. 예수와 하느님은 왜 가까웠을까. 예수의 내면이 '신의 속성'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수 안에는 '하느님'이 있었다. 그러니 가까울 수밖에 없다. 친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절로 호칭이 나온다. "아빠!"

우리는 다르다. 여전히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건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늘 '거리'가 있다. 그래서 "아빠"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저 엄격하고 거룩한 분이다. 우리가 기도를 올려야 하는 대상이다. 내가 감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렇게 거룩한 하느님을 향해 예수는 "아빠"라고 불렀다. 굉장한 파격이었다. 실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도 그랬다. 첫째가 안식일을 어겼고 둘째가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러서다. 그걸 통해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장18절)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 자신의 기도문을 그대로 전했다. 아람어로 "압바"라 부른 '주님의기도'를 그대로 일러주었다. 만약 '압바'라는 호칭이 예수에게만 허락된 것이라면 제자들에게는 달리 가르쳤을 터이다.

예수의 눈에 하느님은 자신에게도 '압바'이고 제자들에게도 '압바'였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 '압바'이다. 왜 그럴까. 인간을 지을 때 하느님이 '신의 속성'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런 '신의 속성'이 우리 안에 이미 깃들어 있다. 다시 말해 '없이 계신 하느님의 DNA(유전자)'가 우리 안에도 흐른다. 그러니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압바'이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압바)의 이름이 드러나고 아버지(압바)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압바)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 그걸 위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했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말이다. 왜 그럴까. 그곳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이 어디일까. 하느님 나라다. 땅은 어디일까. 나의 나라 나의 내면이다. 하늘이 땅이 되는 일. 예수는 그걸 위해 이 땅에 왔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는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3절) 가난한 마음이 뭔가. 집착 없는 마음이다. '뿌듯함'이 없는 마음이다. 틀어쥔 게 없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일 때 하느님 나라가 온다. 그 마음의 속성과 하느님 나라의 속성이 통하기 때문이다. 물은 물과 하나가 된다. 기름과 물은 하나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하늘나라의 속성과 나의 속성이 통해야 한다. 그래야 땅이 하늘이 된다. 예수의 기도처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예수의 기도는 계속된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복음 6장11절)

여기서 '예수의 눈'이 드러난다. 우리는 하루 세 끼를 먹는다. 아침 점심 저녁. 그로 인해 산다. 예수는 그 세 끼의 출처를 '하느님'이라 말한다. 왜 그랬을까.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남'을 알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 달라진다. 일상 속의 소소한 일들을 통해서도 '아버지의 뜻'을 읽게 된다. 그 뜻에 나를 맡기면 내 마음은 더 가난해진다. 가난해진 만큼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는 법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복음 6장12~13절)

예수는 하늘이 땅이 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했다. 첫 단추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는 일'이다. 그걸 한 다음에야 '하느님의 용서'가 움직인다. 여기에는 '용서의 이치'가 담겨 있다. 용서가 뭔가.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앙금을 털어내는 일이다. 일종의 '포맷'이다. 앙금을 다 털어낼 때 우리는 '텅 빈 마음'이 된다. '하느님 나라'에는 앙금이 없다. 그러니 내게 앙금이 없어야 '하느님 나라'가 올 수 있다. 내게 앙금이 남아 있으면 '하느님 나라'가 오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통로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기도' 를 일러주고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14~15절)

주기도문 교회를 거닐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주님의기도'도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는 불교의 언어다. 아랍어로 된 '주님의기도'도 있었다. 이슬람의 언어다. 히브리어로 된 '주님의기도'도 있었다. 유대교의 언어다. 언어가 다르고 언어에 깔린 종교적 배경이 달라도 메시지는 통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길. 그건 모든 종교의 염원이다.

순례객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예수가 기도한 곳에서 부르는 예수의 기도. 그 기도가 바위에 부딪혔다. 천장에도 울리고 바닥에도 울리고 순례객들의 심장에도 울렸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복음 6장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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