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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탐욕에 대항" 미 민주당 정강에 '샌더스 파워'

최저임금 대폭 인상, 보호무역…
정강에 자기 색깔 반영한 샌더스
지지자들 향해 "우리가 이겼다"
금융거래 제한 위해 거래세 강화
CNBC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강"
클린턴 정책도 급좌회전 가능성


"우리는 공정한 경제를 위해 월가의 탐욕과 방종에 대항해 싸운다."

서구 학생운동이 부활한 1960년대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 거리에 울려 퍼지던 구호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뉴욕 맨해튼을 휩쓴 월가 점령운동 단체가 뿌린 전단의 일부도 아니다.

2016년 7월 11일 미국 민주당이 확정한 정강의 한 대목이다. 무엇보다 민주당은 역사적으로 공화당과 미국 권력을 반분해오지 않았던가. 미국 경제매체인 CNBC는 "민주당이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강을 제정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다. 1900년과 1908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후보 수락 연설에서 "황금의 십자가(금본위제 또는 금권)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자!"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공황 절정기인 1933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돈놀이꾼(월가)이 이제 용서를 구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대선 후보나 당선자의 말이었다.

반면 민주당 정강의 문체는 대체로 온건했다. 버락 오바마가 두 번째 임기 시작을 앞두고 제정된 2012년 정강엔 "비용과 효과를 감안한 규제개혁을 바탕으로 한 21세기 정부"와 같은 문구가 들어 있었다. 오바마가 민주당 출신 대통령 가운데 상당히 진보적이지만 정강만큼은 신자유주의 영향이 컸던 빌 클린턴(1993~2001년)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 언론이 민주당 정강을 '잊힌 문서'라고 부르곤 했다. 심지어 월가의 투자 은행가들은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 정강을 '묘비 문구(epitaph)'라고 무시하곤 했다. 거의 모든 묘비 문구가 그렇듯이 미 정당의 정강이 천편일률적이어서다. 미 주요 언론은 정강 수정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이번은 아니었다. 정강 내용뿐 아니라 협상 과정부터 미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워싱턴포스트(WP)나 뉴욕타임스(NYT) 등이 보도한 '민주당 정강위원회 세력 다툼' 등이다. 계기는 한 인물의 존재였다. 버니 샌더스다. 힐러리 클린턴과 대선후보 경선을 펼친 상원의원이다. 그는 스스로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샌더스 같은 민주당 좌파는 경선의 들러리였다. 이번은 아니다. 미국의 빈부격차가 낳은 갈등이 샌더스 위상을 강화시켰다. 힐러리가 그의 도움을 받아야 대선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다. NYT는 "샌더스가 이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정강위원회에 자기 사람을 대거 밀어 넣었다"고 전했다. 올해 민주당 정강에 '샌더스 생각과 정책'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번 정강의 핵심 내용은 최저임금 대폭 인상,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이다. 그런데 미국 내에선 정작 주목받는 대목이 따로 있다. 바로 정강 13장 가운데 세 번째에 배치된 '경제정의' 항목이다.

첫 문장부터 심상찮다. '민주당원은 요즘 소득과 부의 극단적인 불평등이 미국 국민과 우리의 경제에 나쁘다고 본다'고 적시했다. 이어 '월가가 중소기업 자금공급 등을 포함해 일자리 창출과 생산적인 경제를 위해 복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주식 투자나 파생상품 투자 등을 최대한 억제하겠다는 얘기다.

이는 '관치금융의 아버지'인 할마르 샤흐트 전 독일 중앙은행 총재가 1932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했던 말과 유사하다. 그는 당시 "세계 금융계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생산적인 영역이 아니라 주식 투자 등에 돈을 너무 많이 공급해 거품과 공황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이후 샤흐트는 시중 자금이 증시나 비생산적인 영역으로 흘러가는 것을 공격적으로 억제했다. 대신 아우토반(고속도로) 건설 등에 특별금융을 적극 지원했다. 관치금융의 시작이다.

월가 금융회사가 신용평가회사를 고를 수 없게 될 전망이다. 투자은행 등이 설립한 각종 페이퍼 컴퍼니(가공회사)가 채권을 발행하면서 입맛에 맞는 신용평가회사를 고르곤 했다. 그 바람에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발생했다. 민주당은 이런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민주당은 사실상 금융거래도 제한할 요량이다. 엄청난 속도로 자산을 사고파는 컴퓨터 프로그램 트레이딩 등을 제한하기 위해 거래세를 강화하기로 했다. 거대 금융그룹을 쪼개 투자와 시중은행으로 나눌 계획을 분명히 했다. 이 밖에 ▶독점 규제 강화 ▶법인세 감면 제한 ▶부자 증세 등을 명시됐다.

WSJ는 월가 사람들의 말을 빌려 "민주당이 왼쪽으로 급선회했다"고 했다. 과장이 아니다. 정강 내용을 보면 민주당이 대공황 시대 집권한 루스벨트 시대 이후 가장 왼쪽으로 이동했다. 80여 년 만에 민주당 내 반(反) 월가 또는 금융의 유전자(DNA)가 발현되고 있는 셈이다.

보수적인 금융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월스트리트 제국』이란 책에서 "민주당은 18세기 독립 이후 줄곧 금권(money power)을 경계하고 반대해왔다"고 설명했다. 실제 민주당의 이념적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미국 초대 국무장관, 3대 대통령)은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추진한 중앙은행 설립을 극력 반대했다. 금융권력이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집중될 가능성 때문이다. 대신 제퍼슨은 "주별로 독립적인 세금 제도와 금융 시스템이 우리에게 적합하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1791년 해밀턴은 제퍼슨 세력의 반대를 뚫고 중앙은행 격인 합중국은행(Bank of United States)을 설립했다. 합중국은행은 20년 후인 1811년 폐쇄됐다. 이어 1816년 2차 합중국은행이 설립됐다가 1836년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 합중국은행을 폐지했다. 면허를 연장해주지 않는 방식이었다. 금융 역사가 고든은 2009년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합중국은행 폐지 이후 미 통화와 금융 시스템은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실물경제와 부조화 상태였다"고 말했다.

결국 민주당은 현실과 타협했다. 19세기 후반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1910년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경제적 필요 때문에 월가가 원하는 정책을 받아들였다. 윌슨은 연방준비제도(Fed)를 설립해 안정적인 통화 공급과 경기 조절을 가능하게 했다.

타협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윌슨 직전 대선 후보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반(反)월가 정책을 내걸었다. 긴장한 월가가 윌리엄 매킨리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브라이언의 집권을 막았다.

역사적인 흐름에 비춰 보면 2016년 민주당 정강은 제퍼슨-잭슨-제닝스-루스벨트 시대에 표면화한 반(反)금권 DNA가 다시 힘을 발휘한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반월가 정책이 정강이란 공식 문서에 명시됐다는 사실이다.

힐러리가 집권 이후엔 현실을 감안해 정강과 거리를 둘 수도 있다. WP는 "이전 사례를 보면 후보가 집권하면 정강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예전과 다를 것이라는 조짐이 보인다. 샌더스는 최근 지지자들에게 "우리는 승리했다. 우리의 목소리를 정강에 반영했고, 이는 앞으로 훌륭한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샌더스는 이어 12일 뉴햄프셔주 공동 유세에서 "왜 내가 힐러리를 지지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말했다. 공동 유세를 근거로 힐러리를 압박하는 분위기가 엿보인다.

또 다른 조짐이 있다. 힐러리의 러닝메이트(부통령) 결정이다. 샌더스 못지않게 진보적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거론되고 있다. 정치전문 매체인 슬레이트는 "윌슨이 반월가 대선 후보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1918년 국무장관에 지명한 것과 비슷한 일이 2016년에 재연될 수 있다"고 했다.

윌슨은 대선 도중 민주당 좌파의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브라이언을 국무장관에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브라이언은 윌슨이 월가 쪽으로 기우는 것을 끊임없이 견제했다. 반월가 대표주자인 워런 상원의원이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면 힐러리 집권 이후 어떤 역할을 할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16년 민주당 정강은 죽은 문서가 아니다. 살아서 활활 타오르는 문서다.

미국 민주당 정강정책 위원회=미국 민주당 정강은 1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정한다. 2016년 정강은 올 5월 구성된 위원회에서 제정됐다. 올해 위원회는 힐러리 클린턴이 추천하는 위원 6명,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추천하는 위원 5명,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위원장인 데비 바서만 하원의원이 추천하는 4명으로 채워졌다. 소수파인 샌더스 진영에 5명이나 배정됐다. 힐러리가 샌더스의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한 양보였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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