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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브렉시트와 '붉은 죽음의 가면'

송병우 / 목사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민개혁안 부결 소식을 접하면서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붉은 죽음의 가면(The Masque of the Red Death)'이 문득 떠오른다.

중세 유럽의 한 나라에 '붉은 죽음(적사병)'이라는 이름의 치명적인 괴질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그 병에 걸리면 얼굴과 온 몸이 붉게 변하고 심하게 앓다가 반 시간 후에는 죽고 마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런데 그 나라의 황태자와 그를 따르는 1000명의 귀족들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 수도원에 들어가 머물며 괴질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 안에서 그들은 밤마다 파티를 열어 쾌락을 즐기고 자신들의 안녕만 도모할 뿐, 담장 밖에서 죽어가는 많은 백성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어느 날 밤 가면무도회가 절정에 이를 때, 황태자는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 가운데 한 남자가 몸에는 상복을 입고 얼굴에는 붉은 죽음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대로한 황태자는 칼을 빼어들고 그 괴한을 쫓아가 가면을 벗기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크게 놀라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가면 속에 사람은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었다. 거기에는 '붉은 죽음' 그 자체만 남아 있었다.



황태자와 함께 수도원 높은 방벽의 보호 속에 안락을 즐기던 선남선녀들은 물론, 온 나라가 어둠과 부패와 '붉은 죽음'의 제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 이 소설의 끝이다.

170여년 전에 쓰인 소설이 놀랍게도 마치 오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미국, 영국 같은 선진국의 국민 입장에서는 마구 밀려 들어오는 이민자나 난민이, 그리고 그들이 함께 가져오는 이질문화가, 마치 자신들의 목을 죄며 위협하는 괴질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다분히 그럴 것이다. 그 괴질의 근본 원인이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그 민족들에 저질러온 탐욕적 침탈에 있다는 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그래서 영국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브렉시트를 선택했으며, 미국의 대법원은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면서 이민개혁안을 거부했다. 아마도 스스로를 안전한 담장 안에 보호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이 점점 더 좁아지는 세계 속에서 도도하게 밀려오는 민족의 이동을 과연 얼마나 막아 낼 수 있으며, 양안(兩岸)을 오가는 문화의 물결을 과연 어느 만큼이나 저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결국은 브렉시트가 초래한 엄청난 경제위기가 마치 담장 안 무도회에 불쑥 나타난 '붉은 죽음'처럼, 피아(彼我) 모두를 혼란과 파멸로 몰아가는 전조가 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스럽다.

이야기 속의 높은 담장이 아무 쓸모가 없었듯이 멕시코와의 국경에 담장을 쌓겠다는 트럼프의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붉은 죽음'을 이겨내는 길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있다면 무엇일까? 오히려 높은 담장을 낮추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처한 삶의 현실을 이해하고 공유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치유해 나가는 길 만이 지금 세계를 향해 무섭게 다가오고 있는 '오늘의 붉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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