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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증오 대신 사랑을!…올랜도 총격 희생자 애도 물결

[현장 속으로] LGBT 메카 그리니치빌리지 스톤월에 가다
뉴욕시장 연설에 "정치 아니다"

빌 드블라지오 뉴욕시장의 추모 연설을 앞둔 13일 오후 8시쯤, 미국의 LGBT 인권의 성지인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 ‘스톤월 인’에 운집한 한 시민이 무지개색 깃발을 높이 들며 “이건 정치인에 관한 게 아니다”고 외쳤다.

이 곳엔 수천 명이 운집했다. 이들은 플로리다주 올랜도 게이클럽 총격 사건으로 숨진 49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었다. 이들의 행렬은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 크리스토퍼스트리트를 따라 약 1마일가량 이어졌고 드블라지오 시장은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의 메카 스톤월 인(Stonewall Inn·이하 스톤월) 앞에서 연설을 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 모인 시민들은 이날의 집회가 정치로 포장되기를 거부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달라!(Say their names!)” 운집한 시민들은 올랜도 게이클럽에서 숨진 49명의 희생자 전원의 이름을 호명하자고 외쳤다.

올랜도 게이클럽 총기테러 발생 이틀 후인 이날, 전 세계 LGTB 멤버들의 성지로 불리는 그리니치빌리지 스톤월 앞에는 이날 뉴욕주지사와 시장 등 주요 정치인이나 LGBT 인권운동가뿐 아니라 성별과 인종·세대를 넘나드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대거 참가했다.



희생자 49명 이름 부를 때마다 "프레젠테!"
(Presente·스패니시로 "저 여기 있습니다")

동성결혼 합헌 판결 이후 최대 인파
한인 성소수자들도 추모 행렬 동참
"성별·종교·인종 따른 차별 없어야"


약 1년 전 연방대법원이 전국 동성결혼 합헌 선언을 한 뒤 대규모 집회가 열렸던 이래 이곳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땐 환희로 가득찬 행렬이었지만 이날은 충격과 슬픔을 안고 거리로 나왔다.



지난 50년 동안 LGBT 성소수자들의 메카로 불리며 이들의 정신적 피난처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이곳 스톤월이다. 한 시민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는 곳이 이곳 LGBT 주점 스톤월이다. 올랜도 게이클럽도 스톤월처럼 성소수자들이 자유를 느끼기 위해 모이는 곳이었을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인권 수호를 외치는 스톤월 앞 게이 운동이 ‘폭동’으로 덧칠되며 뉴욕시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1960년대와 달리 이날은 경찰의 보호 아래 긴 행렬을 차분히 이어갈 수 있었다.

남자친구의 손을 꼭 잡고 눈을 지그시 감은 백인 남성부터 여자친구를 꼭 껴안아주는 아시안 여성, 오늘은 짧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고 싶지만 내일은 남성이고 싶은 퀴어(queer), 아내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슬람계 남성까지 인종·성별·세대를 초월한 시민 행렬이 7시간 내내 이어졌다. 추모 행렬이 끝난 자정을 넘어서도 스톤월 앞에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꺼져가는 촛불을 지키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올랜도 총기테러 이후 신문과 TV방송을 장악한 ‘총기’ ‘테러조직’ ‘ISIS’와 같은 단어는 이날 찾아보기 힘들었다. 앤드류 쿠오모 뉴욕주지사와 윌리엄 브래튼 뉴욕시경국장, 그리고 총기규제 운동가들의 연설이 진행될 때만 “총기규제(Gun Control!)” “지금 바로(Now!)”와 같은 고함이 드문드문 들릴 뿐이었다.

대신 ‘사랑이 증오를 이긴다(Love Conquer Hate)’ ‘총기 말고 사랑을 알리자(Promote Love Not Guns)’ ‘동성애·트랜스 혐오와 인종차별 반대’ ‘혐오 중단(STOP THE HATE)’ 등이 적힌 푯말들이 가득했다. 폭력과 증오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말하고 싶었고, 분노의 고함보다는 침묵으로 응답하고 싶었다.

49명의 희생자를 낳은 총격범의 이름은 이날 거론되지 않았다. 퀴어인 친구와 행렬에 참가한 한 20대 여성은 “총격범이 무슬림임을 강조하면 또 다른 소수자를 종교와 인종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된다”며 “이번 총격사건으로 인해 이슬람 혐오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우리 LGBT 멤버들이 해야 할 일이다”고 강조했다. 숨진 희생자 대부분이 히스패닉 성소수자였던 점을 들며 시민들은 소수계 인종차별 중단을 외치기도 했다.

시민 행렬 속에는 한국어로 적힌 ‘함께 싸워요, 우리.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푯말이 눈에 띄었다. 뉴욕시 성소수자부모협회를 이끌고 있는 클라라 윤씨는 한인 성소수자 두 명과 함께 무지개색 깃발을 들고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다. “트랜스젠더인 아들이 어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고 눈물이 멈추질 않더라구요. ‘우리 (LGBT) 커뮤니티를 이렇게 공격하려 해도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글이었어요. 아들의 절규가 느껴지더라구요. 그간 잊고 있었던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로서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나왔어요.”

옆에 있던 주승섭(25)씨도 덧붙였다. “어제 맨해튼 유니온스퀘어에서 열린 행렬에도 친구들과 참여했어요. 아시안 성소수자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 혐오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화살이 또 다른 소수자에게 향하지 않도록 애쓰고 있어요.”

시민들의 사랑과 위로로 추모 행렬은 폭력과 증오·분노를 넘어 인종·성별·종교·세대를 초월한 화합의 장이 될 수 있었다.

‘앤리크 리오스, 25살’ ‘조나단 베가, 24살’ ‘크리스토퍼 네이노넨, 32살’ ‘킴벌리 모리스, 37살’…. 저물어 가는 석양을 등진 시민들은 촛불과 휴대전화로 불빛을 밝히며 49명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하나씩 불리자 이들을 위해 대신 목청껏 응답했다. “프레젠테!(Presente·스패니시로 ‘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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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월 인(Stonewall Inn)=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 W4스트리트·웨벌리플레이스 사이 크리스토퍼스트리트 선상에 위치한 주점. 현재 위치에 1967년 오픈 당시 전국 최대 게이클럽으로 알려졌었다. 1969년 6월 28일 이곳에서 게이 인권 운동이 촉발되자 이를 폭동으로 간주한 뉴욕시 경찰의 급습으로 한동안 폐쇄됐다. 이후 1990년대 그리니치빌리지 역사유적지 보존 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 2007년 3월 개보수 작업을 거친 후 재오픈, LGBT의 성지라 불리며 이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스톤월인은 지난해 뉴욕시정부로부터 LGBT 인권운동의 기념비적 역사유적지로 인정 받았으며 최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곳 건물을 국립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조은·심지영·이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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