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서 새로운 희망 일군다

[현장 르포]볼티모어 폭동 1주년
곳곳에 상처는 여전…재기의 몸부림도 활발
일부 한인들 볼티모어 탈출 새로운 삶 시작

차례
1. 폭동 그 후 1년 현장 르포
2. 폭동 1주년 주류언론 시각
3. 좌담회 - 회고와 희망 찾기

지역사회는 물론 전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한 볼티모어 폭동이 일어난지 오는 27일이면 일년이 됩니다. 당시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한인업소만 100곳이 넘습니다. 폭도들에게 폭행당해 중상을 입은 상인들의 소식까지 들려오면서 한인들은 비통에 잠겨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본지는 폭동 1주년을 맞아 세 차례에 걸쳐 절망을 딛고 새롭게 일어서는 상인들의 모습과 폭동 1주년을 바라보는 미 주류사회의 시각을 전하는 한편 한인지도자들과 함께 아직도 아물지 않은 아픔을 달래고 새 희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1968년 이후 거의 반세기 만에 재현된 무법천지. 메케한 연기와 화염, 투석전, 무차별 파괴와 약탈, 지난해 4월의 끝자락 볼티모어의 풍경이다.


 
폭동의 진원지에서 한인 상점들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분노와 화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룻밤 새 망가진 400여 업소 중 25%가량이 한인 업소였다. 쑥대밭으로 변한 가게를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졌다. 이들에게 가게는 삶의 터전이고,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었기 때문이다.
 
폭동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지 꼭 1년. 여전히 볼티모어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다. 폭동의 상처와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이 약이던가? 피해 한인들 상당수는 새로운 희망을 위해, 또 다른 일부는 살기 위해서 쓰라린 아픔을 기억의 뒤편으로 밀어내고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재기의 몸부림을 펴고 있다.
 
지난 20일 폭동의 시발점이 된 고 프레디 그레이가 살던 동네를 찾았다. 볼티모어 서쪽 샌드타운-윈체스터다. 빈집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가장 낙후한 지역 중 하나다.
 
이곳에서 30여 년째 그로서리를 운영하는 그레이스 여 씨. 폭동 당시 4개의 가게 중 한 곳이 전소됐다. 가게 이름은 한국식인 ‘해 뜨는 마켓’이다.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물쇠가 굳게 잠가져 있다. 입구 처마는 불에 탄 시커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철조망 사이로 들여다본 내부도 일부는 수리했지만, 불에 탄 냉장고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하지만 가게 옆 건물 외벽은 벽화 그림으로 가득 찼다. 호랑이와 독수리, 사람의 눈동자, 아프리카 야수인 팬더스 등이 화려한 색으로 그려져 있다. 폭동 사태 이후 메릴랜드 미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수소문 끝에 그녀를 찾아와 희망을 노래하며 그린 그림이다. 상처 속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의 속삭임이기도 하다.
 
“처음 두 달은 너무나 어수선했어요. 불에 탄 가게도 가게지만, 미국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어요. 또 원망스러웠죠. 여러 생각이 다 들었어요. 하지만 내 터전이 여기라는 것, 나를 통해서 이곳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어요””
 
1981년 이곳에 정착한 여 씨에게 샌드타운은 제2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모두 ‘마마’라고 부를 정도로 이민자가 아니라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이 지역에 희망을 불어넣자는 의미로 그녀는 가게 이름을
‘해 뜨는 마켓’, ‘불루밍 선’, 블루밍 드림스 마켓, 뉴 샌드타운 마켓 등으로 지었다. 그런 그녀의 가게가 불에 탄 것이다.
 
가게를 복구하기 위해 그동안 SBA 융자 등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자격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시 당국으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여 씨는 “결국 내가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하나님이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해요. 해 뜨는 마켓은 6월 중에 다시 오픈할 생각입니다. 이곳에 평화를 심을 겁니다”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 씨의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모셔 스트리트 선상의 OK 그로서리. 황정연 씨가 방탄유리를 앞에 두고 고객들에게 물건을 건네준다. 그의 가게도 그날 털렸다. 하지만 남다른 유명세는 그 뒤에 이어졌다. 폭동이 나고 며칠 후 경찰과 언론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레이 호송차가 가게 앞 사거리 부근에서 멈춰선 지역으로, 사망 사건의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내달 열리는 경찰관 재판에 참고인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에게 볼티모어 폭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 사건 이후 가게를 포기하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어요. 장사도 안될뿐더러 자꾸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생각나고, 지금은 그냥 흐르는 대로 가자는 생각뿐입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선상의 원더랜드 리커스토어. 21년째 가게를 운영하면서 작년 같은 상황은 처음이었다. 모든 물건이 다 털린 것이다.
 
윤혜경 씨는 “새벽에 알람이 울렸지만, 어떻게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물건만 훔쳐가고 장비를 부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폭동사태 이후 다시 가게 문을 열자 고객으로 오던 일부는 문을 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다시 오게 돼 고맙다.”, “맘 우리가 앞으로 도와주겠다.”, “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고 윤 씨는 말했다.
 
노스 애비뉴 선상의 킴스 리커스토어. 이한엽씨 가게다. 폭동 이후 하루 만에 다시 문을 열었지만, 진절머리 나는 사건에 가게를 내놓았다. 하지만 팔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버텨가고 있다.
 
“ CCTV에 밤새도록 찍힌 장면을 보고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 이들을 다 감옥에 보낼까 생각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약해지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요.”
 
다만 폭동 사건 이후 아이들이 오히려 순진해졌다고 덧붙였다. CCTV에 찍힌 걸 아는지 그 이후 1년 동안 단 한 건의 도둑도 없었다고 말했다.
 
볼티모어 서쪽 루트 40 에드먼슨 부근의 프레디스 리커스토어. 약탈범들에 폭행까지 당한 박영민 씨다. 당시 10만 달러 가량을 털렸다. 약탈 후 3개월 만에 다시 오픈했다.
 
박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의욕을 잃었어요. 가게도 내놓았지만 팔리지가 않습니다”고 말했다. 일부 보험 처리는 됐지만, 턱없이 부족한 액수고, 바로 옆 빈집 철거 공사까지 겹치면서 매출도 오르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집도 규모를 줄여 아파트로 이사했다.
 
“미국에 와서 첫 가게였어요. 13년 동안 지탱해 준 고마운 동네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정이 떨어졌어요. 그만 두려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후회는 없어요.”
 
삶의 의욕이 떨어진 박 씨 부부는 최근 들어 매주 화요일에는 일찍 문을 닫고 배드민턴 동우회 활동으로 의욕을 보충하고 있다.
 
폭동의 기억에 아직도 몸서리치는 이들도 있다. 김종민·김영미 씨 부부다.
김 씨 부부는 볼티모어에서도 다운타운에 있는 가게를 운영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폭동은 이들의 삶의 터전까지 앗아갔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한 달 동안 술만 먹고 살 정도로 폐인이 됐지요. 아내는 자다가도 악몽에 벌떡 일어날 정도였어요. 볼티모어라는 이름만 나와도 정색을 했으니까요.”  

결국, 이들 부부는 가게를 팔기도 전인 지난해 12월 볼티모어를 떠났다. 13년 동안 청춘을 쏟아부은 가게를 포기할 정도로 볼티모어가 싫었기 때문이다. 고객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다는 것도 떠난 이유 중의 하나다.
 
고민하다 이들은 하워드카운티 컬럼비아 108번 선상에 애나스 커피숍을 차렸다.
 
김종민 씨는 “커피는 마실 줄만 알았지 만드는 방법을 몰라 처음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많았어요. 이제 한 5개월쯤 하다 보니 손님의 취향을 맞춰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볼티모어보다 수익이 줄었다는 이들 부부는 아직은 젊어서 스스로 선택에 결코 후회가 없다면서, 커다란 욕심 없이 열심히 사는 것으로 만족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에 대한, 이웃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했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큰 사건을 경험하면서 주위에 의외로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결국 사람들로 인해 힐링되고, 살아가는 힘을 얻었습니다.”
 
   
  ☞볼티모어 폭동 일지
 4월 12일 프레디 그레이 경찰 체포후 1주일만에 사망
 4월 27일 그레이 장례식 이후 폭동으로 번짐,
 4월 28일: 주 정부 비상사태 선포, 야간 통행금지, 주 방위군 투입
 4월 29일: 한인 공동대책위 구성
 5월 1일: 시 검찰, 경찰관 6명 전격 기소
 5월 3일: 야간 통행금지 해제


허태준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