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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발밑을 살피는 지혜(照顧 脚下)

김준혜

중국 송나라 때 오조 법연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선문답에서 ‘거울이 삼라만상의 상을 맺은 후 거울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상을 맺고도 거울은 만상 어디든지 존재한다고 하여 유일하게 통과한 바로 그 법연스님이다. 법연의 문하에 특별히 배움과 닦음이 남다른 제자 세명이 있었는데 혜근, 청원, 극근 스님이 그들이다.

겨울을 코앞에 둔 어느날이었다. 법연이 세 명의 제자와 밤길을 밝혀 산길을 내려오다 가랑잎 솟구치는 바람에 그만 등불이 꺼져버렸다. 사위는 칠흑 같았고 발밑엔 천길 낭떠러지요 큰 짐승이 있던 시절이니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법연은 제자들의 수행을 가늠할 겸 자신의 두려움도 떨칠 요량으로 “자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라고 어둠 속에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첫 번째로 혜근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느낌을 말했다. 광란하듯 채색 바람이 춤을 추니 앞이 온통 붉사옵니다 하였고, 두 번째 청원은 쇠 뱀이 옛길을 가로질러 가는 듯하옵니다 하며 뜻 모를 말만 늘어놓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대답한 극근의 말이 걸작이었다. 우선은 불을 비추어 발밑을 봐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조고각하(照顧 脚下)’의 현답을 추려내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아마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던 노승의 눈매에도 미소가 돌고 얼굴까지 환해지는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흔히 산사에 가면 법당이나 승방에 신발 벗어놓는 댓돌 위에 조고각하(照顧 脚下)의 글귀가 걸려 있다. 좁혀 해석하면 신발을 잘 벗어 놓으라는 가르침도 되겠지만 아마도 그보다 더 큰 섭리가 어려있을 듯싶다. 법연의 시대가 지나도 깨달음은 계속된다. 시대를 달리하여 한 수좌가 선사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선사가 대답한다. “불을 비추어 네 발밑을 보라.” 수좌는 거창하게 구도의 근본을 물었지만, 대답은 지극히 소박했다. 필경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먼저 알라는 말일 것이다.

 도는 뜻밖에 눈감은 후 기침 소리처럼 바로 그 눈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대학으로 풀이하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소크라테스 언어로는 ‘너 자신을 알라’가 될 것이며 성경으로 말하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로 까지 외연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흉흉하다. 광명성이 올라간 후 세상은 그 이름이 뜻하듯 더 밝아진 것이 아니라 훨씬 어두워졌다. 남북관계는 통일 대박을 외치다 별안간 버르장머리를 움켜잡았고, 개성공단에 빗장을 걸어 마구잡이 멱살잡이로 치닫고 있다. 본디 한 몸에서 나왔으나 이제는 영락없이 콩깍지를 사르고 태워 콩을 삶고 있는 형국이며, 이웃은 빙글거리며 팔짱을 낀채 불을 쬐고 있다. 밖에 나와 사는 우리가 봐도 씁쓸하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칡과 등나무가 얽혀 있는 같은 문제일 것이다. 거울이 상을 맺고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남의 눈만 찌르고 현상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셈하고 생각을 굴려보며 우리들의 발밑을 한번 비추어 보자. 조고각하, 그것은 꼭 불문의 가르침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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