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오스카'로 불거진 미국의 신인종주의
미국 대기업 CEO 102명 중 유색인종은 8명뿐
파워피플 503명 중 유색인 10% 안돼
언론·문화.스포츠 백인 독점 심해
각료, 대도시 시장은 유색인종 두각
"이 역사적인 순간,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수락 연설을 할 때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은 수십 년간 투쟁해 온 흑인의 승리이자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접어든 미국의 승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1960년대 민권운동에 힘입어 법적인 흑백 차별이 철폐되고도 사회에 여전했던 차별과 분열에 마침표가 찍힐 줄 알았다.
그러나 이는 성급한 기대였다. 진정한 다인종 사회로 가는 투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다시 시작됐다. 실질적인 권력을 나누는 '파워 게임'이다. 그 대상도 히스패닉과 아시아계를 포함한 모든 유색인종으로 확대됐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열린 제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둘러싼 논란도 그중 하나였다.
이른바 '화이트 오스카' 논란은 2년 연속 주요 연기 분야에서 백인 배우만 후보로 선정되면서 불거졌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누가 백인만 후보로 올렸느냐는 데 있었다.
2월 28일 LA타임스에 따르면 수상자(작)를 결정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위원회 회원 6261명 중 91%는 백인이다. 흑인은 3%, 히스패닉과 아시안은 각각 2%에 불과하다.
백인이 94%였던 2012년보다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백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아카데미상이 실상 '백인이 뽑는 상'이라는 의미다.
흑인 인권운동가인 알 샤프턴 목사는 "할리우드 의사 결정권자에 대한 문제"라며 "백악관에 흑인 가족이 살고 있는데도 할리우드 권력의 장(場)엔 흑인이 발 붙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포브스가 "오스카의 다양성은 흑인-백인만의 문제가 아니다"고 논쟁을 확대했다. 미국 포춘 100대 기업 CEO 102명의 얼굴 사진. 8명을 제외하고 전부 백인이다. 아래 왼쪽 8명이 유색인종 CEO로 왼쪽부터 조지 파즈(익스프레스 스크립츠 홀딩스), 인드라 누이(펩시코), 후안 루치아노(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 케네스 셔놀트(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케네스 프레이저(머크), 오스카 무노즈(유나이티드 항공), 로저 퍼거슨(교원공제회의, TIAA-CREF), 사티아 나델라(마이크로소프트).
이코노미스트도 "2000년대 이후 아카데미상 수상자 흑인 비율을 따져보면 미국 인구 중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하다. 진짜 차별은 히스패닉과 아시아계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종 비율을 따져가면서 백인이 독점한 권력을 나눠야 한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다.
실제 미국의 인종 구성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88년 전체의 85%를 차지하던 백인 비율은 2013년 62%로 줄었다. 4%에 불과했던 히스패닉은 17%로 급증했고, 10%였던 흑인 비율도 12%로 늘었다. 소수점으로 잡히던 아시아계는 5%에 이르렀다. 전망치는 더욱 극적이다.
퓨리서치센터는 출산율.사망률과 이민 추세 등을 감안해 2060년 미국의 인종 구성을 예측했다. 그에 따르면 백인의 비율은 43%까지 감소하고 히스패닉은 31%, 흑인은 13%, 아시아계는 8%까지 늘었다. 머지않아 미국에서 '유색인종=소수인종'이라는 등식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에 가장 민감한 건 정치권이다. 전체 인구보다 유권자에서 인종 구성 변화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백인 유권자 비율은 74%였다. 전체 인구 중 차지하는 비율(63%)보다 높은 수치다.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이 아직 어렸거나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투표권을 갖지 못한 탓에 백인의 투표 영향력이 크게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 고령자가 많은 백인은 감소하고, 투표권을 얻어 선거에 참여하는 유색인종은 늘 수밖에 없다.
이들의 힘은 이미 증명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2008, 2012년 대선에서 유색인종 몰표에 힘입어 당선됐다. 2012년 대선 패배 후 공화당에선 "대선에 뛰어들 생각이라면 유색인종과 작은 접점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히스패닉 인구가 45%에 이르는 뉴멕시코주에선 31명의 역대 주지사 중 6명을 히스패닉으로 선출했다.
이처럼 미국의 소수자라는 유색인종이 유권자로서 세를 조직하고 당락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자 다음 단계에 봉착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26일 '오스카 후보만큼 하얀 미국 권력의 얼굴'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NYT는 "국가의 운영과 문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미국을 움직이는 '파워 피플'이 누군지 조사했다.
포춘 1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각료, 주지사, 상원의원, 군 수뇌부,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 방송.언론.영화.출판계의 최고 의사결정자, 프로야구.농구.미식축구(MLB.NBA.NFL) 구단주 등 503명이 여기에 포함됐다. 이 중 흑인.히스패닉.아시안 등 유색인종은 10%에도 못 미치는 44명에 불과했다. 미국 사회의 권력 지도가 사회 전체의 인종 다양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분야에 따라 백인의 권력 독점 정도는 달라졌다. 정치 분야의 경우 '정치적 올바름'과 표심에 따라 전체 사회를 반영한 인종 구성이 나타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뿐 아니라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최소 6명의 유색인종 각료를 임명했고, 현재 미국 20대 대도시 시장 중 5명이 유색인종이다.
그러나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알려줄지 결정해 사람들의 생각에 은밀하고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분야일수록 백인의 독점력은 커졌다. 언론.문화.스포츠 분야의 경우다. 이를테면 방송국 CEO와 유명 프로듀서(PD) 29명 중 27명이, 주요 언론사 대표.편집국장 13명 중 11명이 백인이었다.
MLB.NBA.NFL 95개 구단의 구단주 중에선 단 4명이 유색인종이었다. 물론 이들 분야엔 대중에 알려진 유색인종 스타가 많다. 이들은 백인보다 뛰어난 재능으로 무대와 운동장을 장악하기도 한다. NBA 선수 75%가, NFL 선수 70%가 흑인이다.
미국 대중음악 산업은 흑인 가수들의 재능과 인기에 적잖이 의존한다. NYT는 이들이 큰돈을 벌고 인기를 얻었지만 그 무대와 운동장의 규칙을 만드는 건 모조리 백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인기인'과 '결정권자'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성 영화감독 3%, 남녀 불균형 논란도
아카데미상의 인종 다양성 논란은 할리우드 남녀 불균형 논란으로도 확대됐다. 지난달 22일 영국 가디언은 '화이트 오스카'를 계기로 할리우드의 차별이 '총체적 위기' 수준이라고 진단한 미 사우스캐롤라이나대 저널리즘 스쿨의 '다양성에 대한 아넨버그 보고서'의 내용을 보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극중 캐릭터의 33%는 여성이었다. 남성보다 적은 비율이지만 '대단한 차별'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40대 이상 여성 캐릭터로 범위를 좁히니 비율이 25%로 낮아졌다.
또 여성 연기자의 33%는 노출 연기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남성 배우의 경우 10%였다. 여성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방식 자체가 차별적이라는 이야기다.
카메라 뒤에서 활동하는 감독.스태프 등 여성 영화인은 더 열악했다. 여성 감독 비율은 3%, 시나리오 작가 비율도 10%에 그쳤다.
가디언은 "영화 산업의 생태계 자체가 배타적"이라고 지적했다. 여성 감독을 지원하기 위해 열리는 '벡델테스트 축제'를 운영하는 코리나 안트로버스 역시 할리우드 의사 결정권자의 다양성 문제를 거론했다.
"배우와 감독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를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 영화사와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문제다.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폭넓은 고민이 필요하다."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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