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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했던 순간? 매 주일이었지요"

[인물 오디세이] 이임하는 ANC온누리교회 유진소 목사

1996년 10여명 요청에 예배 인도
4년 만에 교인 수 1000명 급성장
2002년 선랜드에 가건물 짓고 이사
치유와 회복 사역으로 부흥 거듭해
이달 중순 부산 호산나교회 이임
LA-부산 교회 공동선교도 구상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목회자야
진정한 영향력 미칠 수 있어"


15년 만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20년 전 LA한인타운에서 개척교회를 시작,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그를 본지 종교 면에 소개한 뒤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당시 의욕 넘치던 젊은 목회자는 그사이 태평양 건너까지 유명세를 타는 스타 목회자가 돼 있었다. 단정히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지만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지나온 세월을 말해줬고 미소년 같던 동안의 눈가에도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았다. 다만 중저음의 울림 좋은 목소리만이 세월을 빗겨 간 듯 여전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그 목소리에도 굳은살이 박혀 이전보다 더 깊어진 듯도 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갑작스런 한국행 소식의 질문과 답변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는 십 수 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삶의 고민과 갈등에 대해, 진정한 목회와 신앙으로까지 정처 없이 흘러갔다. 이달 중순 한국행을 앞두고 정신없이 바쁜 ANC온누리교회(이하 ANC) 유진소(56) 목사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새로운 목회를 꿈꾸다



연세대 철학과 81학번인 그는 장로교 신학대학을 거쳐 1991년부터 한국 온누리교회에서 전도사와 부목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LA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6년 두란노 LA서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부터다. 부임 2주도 채 안 돼 기존 교회가 아닌 새로운 교회에 대한 열망을 가진 한인들 10여명이 당시 한국 온누리교회에 출석 중인 가수 윤형주 장로의 소개로 유 목사를 찾아와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그해 3월, 교인 중 한명이 제공한 LA한인타운 사무실에서 예배를 보게 된 것이 지금 ANC의 시초다. 그 후 ANC는 지금의 선랜드로 이사하기까지 LA한인타운 몇 곳의 건물을 전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홍보를 한 것도 아닌데 교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1996년 10여명으로 시작했던 이 작은 교회는 2년도 채 안 돼 200명으로 늘어났고 크렌셔를 거쳐 윌셔가로 이사해서는 교인 수가 1000여명에 육박했다. 더 이상 그 많은 교인들을 이끌고 타운을 전전할 수만은 없어 ANC는 1999년 선랜드에 17에이커 가량의 부지를 구입하고 전원교회를 계획한다.

"전원교회에 대한 비전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생각했어요. 도시가 아닌 전원이야말로 창조질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교인들이 자연 속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예배하고 삶을 나누는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러나 교회 건축은 쉽지 않았다. 허가를 받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건축비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000여명의 교인들에게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2002년 천막 친 임시건물 하나 덩그러니 지어놓고 선랜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건축업자에게 '가능한 싸게'를 주문한 덕분에 본당이 완공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3년여가 더 걸린 2005년 2월에 이르러서다. 그리고 다시 10여년이 더 흘러 ANC는 부흥에 부흥을 거듭해 랜초쿠카몽가, 베이커스필드, 텍사스 등 캠퍼스 3곳을 포함해 출석교인이 3500여명인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매 주일이 가장 행복

작정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새 이민목회 20년째다. 그 짧지 않은 시간 중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자 1초도 쉬지 않고 그가 답한다. 매 주일이었다고.

"주일마다 예배를 보며 말씀을 전하고 삶을 나누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죠. 아마 그건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겁니다."

그러면서 그의 입가엔 함박웃음이 번졌다. 정말 행복할 때만 지을 수 있는 그런 미소가 입가에 한 가득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교회와 신앙을 통해 성숙해지고 변화했다고 믿었던 이들이 다시 무너지는 것을 볼 때가 가장 마음 아프죠. 그럴 때면 과연 내 사역이 쓸모가 있는 것 인가 하는 자책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잠시 침묵. 다시 그가 말을 잇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외아들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방황하는 것을 볼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교인들의 영적성장을 인도한다면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정작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괴롭고 힘들었죠."

어느새 외아들은 20대 중반을 넘겼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아픈 손가락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울고 웃으며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그의 설교를 들어 본 이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의 목회는 치유와 회복에 깊게 맞닿아 있다.

"이민자의 삶이란 부서지기 쉽고 내면의 상처가 많을 수밖에 없죠. 그러다보니 이민 교회에선 내적 치유와 회복에 대한 요구도 많고 교회 역시 이를 적극 도와 줘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일까. 그는 이미 미주 한인사회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소문난 스타 설교자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닌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그의 설교 속엔 따뜻하게 녹아 있다.

#답을 알고 걷는 좁은 길

이제 이달 중순이면 그는 정답던 세월과 애틋한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부산 호산나 교회로 이임한다. 그러나 그는 10년쯤 뒤엔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그는 부산에 간 뒤에도 1년에 두 차례씩은 LA로 와 ANC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설교자로 강단에도 설 예정이란다. 또 호산나 교회와 ANC가 함께 하는 선교사업도 구상 중이다.

이제 그는 새로운 길 앞에 서 있다. 그 길 위에서 그가 꿈꾸는 목회자 상은 무엇일까.

"특별한 게 있을까요? 그저 목회자로서 제가 정한 도덕적 기준을 지키며 목회를 하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남들의 이목과 상관없이 제 스스로가 부끄럽다면 목회자로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맞아요. 이렇게 스스로 답을 정해놓고 산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죠.(웃음)"

아마 그의 이 대답은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조직사회에서 정색하고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만큼이나 순진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이런 목회자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순진하다는 비아냥거림이 뒤통수에 날아들지라도 이런 목회자 한 명쯤은 어지러운 이 시대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묵묵히 걸어주면 좋겠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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