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정신건강에세이] 앤 섹스턴의 여생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생전에 수많은 영예를 누렸다. 1959년에 ‘독자가 주는 시상’, 같은 해에 ‘프루스트 펠로우쉽’, ‘래드클리프 인스티튜드 펠로우쉽’(1961), ‘레빈손 상’(1962), 그리고 ‘미국 예술원 여행 펠로우쉽’(1963)등을 받았는데 1967년 ‘삶 또는 죽음’(Live or Die)이란 시집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어 ‘셸리 기념상’(1967)을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거기서 187년의 전통을 지닌 ‘파이 베타 카파 클럽”의 최초 여성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구겐하임 펠로우쉽’, ‘포드 재단 상금’을 받고 콜게이트 대학에서 교직을 얻었다. 1970년에 보스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1972년에는 이 대학의 정교수로 선출되었다.

그녀가 1969년 ‘사랑의 시편'(Love Poems),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머시 스트리트’(Mercy Street), 그리고 1972년에 산문시 ‘변형’(Transformation)을 발표했을 때 그녀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섹스턴의 목소리는 점차 고백적 형식에서 벗어나 문화비평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자기 내부 성찰보다는 시의 재료를 외부에서 구하기 시작했다.

1963년 미국 예술원 여행 펠로우쉽으로 받은 상금으로 유럽을 여행했지만 우울증 발작으로 인해 예정보다 한 달 먼저 귀국했다. 한편 남편 케이요는 1966년에 혼자 아프리카 사파리 사냥을 떠났다. 1970년, 남편이 장인을 도와주던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사업을 벌려 독립해 나갔을 때 남편은 도와주었다. 이미 그녀는 작가로 또 시인으로 크게 성공했고 외부로는 자신 있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그녀는 점차 정신치료, 약물, 그리고 친구들이나 남자 애인들에게 심리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정신분석을 해 주던 저명한 정신과 의사와 오래 동안 성관계를 지속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그것도 치료라는 명목으로 매 번 치료비를 지불하는 상태에서.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이름을 날리던 정신 분석 전문의는 의사 면허증을 잃었다. 환자-의사 사이의 성 관계가 발생할 수 있지만 현재 정신과에서는 이를 의료부정이 아닌 범죄행위로 간주한다. 따라서 면허 박탈은 물론 의료사고보험 대상도 되지 않고 신체적인 처벌이나 막대한 배상을 치러야 한다.) 그럴 정도로 그녀는 타인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된 것이었다.

우울증이 자주 재발했기 때문에 그녀는 1973년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며 세 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케이요와 이혼을 요구해 남편과 헤어졌다. 이 때 그녀는 ‘죽음의 기록’(The Death Notebooks)이란 시집을 출간했다. 많은 시에서 죽음에 대한 집요한 집념을 보였다.

말년이 그녀는 우울증과 외로움을 알코올에 의지하거나 남자 친구들과의 성관계로 메우려고 했다. 마침내 1974년 10월 그녀는 메릴랜드에 있는 가우처 대학에서 마지막으로 시 낭독을 마친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십여 년 간 사귄 친구인 시인 맥신 쿠닌과 점심을 나누었다. 그러고는 보스턴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자살하고 만 것이다.

앤 섹스턴만큼 ‘반복성 우울증’으로 인해 고생한 문인도 드물다. 그녀는 46세란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정신분열증 환자들과 달라 생전에 창조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감동적인 시를 남겼다.

그렇다면 그녀의 일생은 성공이었을까? 아니면 실패였을까?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