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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미숙(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학교 버스 정류장

골목이 시작되는 첫 집이었다. 빨간 정지 사인이 전봇대 옆에 똘똘한 동생처럼 서 있었다. 집을 고치자마자 내놓은 듯 돌보지 않은 잔디밭은 민들레가 무성했고, 담장은 세월의 이끼를 이고 있었다. 이웃들은 대략 삼십 년 이상 이 골목에 살아온 분들이었다. 집주인들의 평균 연령이 높다 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막 입학한 딸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이사 온 지 며칠 후, 누군가 벨을 눌렀다. 문을 열었을 때 예쁘장한 아가씨 세 명이 브라우니를 손에 들고,
“Welcome to our neighbor!”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합창을 했다. 그들은 낯선 동네에 발을 막 붙인 우리의 서먹서먹한 마음을 촉촉하고 달콤한 브라우니로 녹여주었다. 카라와 그의 언니들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열 번째쯤 떨어진 집에 살고 있었다. 이렇게 친절하고 사려 깊은 자녀들을 키운 분이 누군가 그 어머니가 몹시 궁금했다. 며칠 뒤 잡채를 만들어 가까운 집에 모두 돌리며 한국식으로 인사를 하고, 카라의 집을 찾아갔다.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카라와 교사로 일하고 있는 카라의 언니들이 어릴 적에는 이 골목에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카라의 어머니는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모두 자라 하나 둘 씩 골목에서 떠나고 이제는 대부분 어르신만 남아있는 것이다.
학생 수가 많지 않은 이유로 집 앞엔 더 이상 학교 버스가 서지 않았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을씨년스럽고 컴컴한 새벽이면 먼 거리까지 걷는 딸이 안쓰러워 아침마다 차로 언덕을 내려가 새 주택단지 앞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두 아이가 모두 집을 떠난, 재작년 어느 날 아침, 고즈넉하던 동네에 어디선가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라인드를 젖히고 보니 아이들이 줄을 서서 학교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골목 안의 집들이 개축, 증축을 하고, 집 앞에 학교버스 정류장이 다시 생긴 것이다.


요즘 골목에 마을다운 정감이 흐르는 때는 초등학생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한낮 , 나른한 오후, 햇살이 드는 식탁에서 오롯이 차를 즐기다 아이들 목소리에 반가워 창밖을 내다본다. 부모들은 차를 몰고 나오거나 개를 데리고 나와 이웃과 담소를 나눈다. 학교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린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 안긴다. 아침에 본 엄마가 뭐 그리 반가울까! 친구네 강아지를 모두 한 번씩 쓰다듬어준다. 무언가 재미있는 놀이를 함께 하기로 한 듯 어깨동무를 한 두 사내아이가 쏜살같이 골목 안으로 사라진다. 그 풍경 가운데 서 있던 내 아이들은 지금은 훌쩍 자라, 먼 곳에 있다.
아이들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마당을 내다본다. 뒷집엔 호랑가시나무가 있다. 매섭게 뾰족한 초록 잎과 빨간 열매의 보색대비가 더욱 선명해지던 지난겨울, 나는 가위를 들고 담장으로 다가가 담장 너머로 팔을 쭉 뻗은 가지 몇 개를 싹둑 잘라서 성탄절 리스를 장식했다. 옆집에도 같은 나무가 있는데 수나무인 듯 열매 없이 잎만 푸르고 무성하다. 해마다 성큼성큼 자라 이제는 우리 집 채소밭이 받아야 할 오후 햇살을 떡하니 가로막는다. 담장 너머의 나무인데 지금은 담장을 우리 집 쪽으로 밀어 눕힐 기세로 살이 찌고 있다. 오월이면 뒷집엔 분홍과 빨강 로디가 무리 지어 피어난다. 오래전 두 집의 합의가 있었던 듯, 로디가 피는 곳엔 그들이 맘껏 팔을 펼치며 자랄 수 있도록 담장이 절반 길이로 나지막하다. 화려한 로디 덕에 오월과 유월 우리 집 뒤뜰은 풍성한 꽃 잔치다. 그 잔치를 양쪽 집에서 맘껏 즐기고 있다.
이렇듯 이웃과의 경계는 때때로 모호하다. 약간의 양보와 침범, 그리고 약간의 합의가 있다. 우리 아이들이 베풀고 베풂을 받는 일과 서로 동의하는 일이 원만히 이루어지는 마을에서 자라는 것은 복이다. 그러기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하질 않는가!
어둑어둑 새벽, 후드를 쓰고, 우산을 들고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정지 싸인 옆에 잎 넓은 상록수라도 심어야 할까? 아이들이 잠시라도 비를 그을 수 있게. 마음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새해, 새 날이 또 오고 있다. 사랑스러운 내 이웃의 아이들아, 잘 자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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