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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은 낭만여행]분수의 도시 로마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제작한 피우미 분수가 최고

로마에는 광장마다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크고 작은 분수를 모두 합치면 2000개가 넘는다. 가히 세계 최고의 분수 도시다. 로마인들은 고대시대로부터 물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기 98년에 이미 로마에는 39개의 기념비적인 분수와 591개의 공공수로가 세워졌다. 시민들은 오고 가며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었으며 분수는 도시의 미관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판테온에서 가까운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도 예외는 아니다. 이곳에는 모로 분수, 네투노 분수, 피우미 분수 등 3개의 멋진 분수가 있다. 나보나 광장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의해 서기 81~9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경기장이다. 이곳에서는 전차경기, 군인들의 행렬, 모의해전 등이 열리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 되었다가 광장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나보나 광장은 로마시민들에게는 만남의 장소요 여행객들에게는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다.

멋진 신사들이 걸어 가면 광장은 활기에 넘치고 여인의 가슴에는 꽃향기가 핀다. 광장에서 추억을 담는 젊은이들의 미소도 싱그럽다. 몽마르트의 화가들처럼 이곳에도 여행객의 얼굴 모습을 스케치하는 화가들이 있다.

그러나 몽마르트 언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며 상인들은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몽마르트 언덕에 실망한 사람도 나보나 광장에서는 유럽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광장 주변에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도 많다. 이곳에서는 커피, 와인 등 음료수나 피자, 파스타 등 이탈리안식 식사를 즐길며 쉴 수가 있다.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즐기는 식사는 광장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줄 것이다.

광장의 북쪽 끝에는 ‘네투노 분수’가 자리 잡고 있다. 네투노 분수는 1574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에 의해 설계됐지만 ‘땜장이의 분수’로 불리며 완성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878년, 거대한 문어, 돌고래, 천사, 네투노 등 조각을 더하자 그 때부터 네투노 분수로 불리게 된 것이다.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에게 사사 받은 조각가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스포르자 경당 등 미켈란젤로 사후 그의 많은 작품을 마무리한 조각가였다. 남쪽에 있는 ‘모로 분수’ 또한 포르타가 돌고래와 4명의 트리톤 조각상을 제작했다. 트리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 중 하나로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무어인 조각상은 1653년 베르니니가 제작해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돌고래, 트리톤, 무어인 조각품은 모두 복사품이다. 진품은 보르게세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네투노 분수와 모로 분수는 로마에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분수 중에는 가장 오래된 분수로 구분된다. 중앙에 오벨리스크를 떠받치며 물을 뿜고 있는 것은 피우미 분수(4대 강 분수)다.

나보나 광장에서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분수를 제작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추앙받던 잔 로렌초 베르니니. 분수는 아프리카의 나일 강, 유럽의 다뉴브 강, 아시아의 갠지스 강, 아메리카의 라플라타 강 등 4개 대륙을 의인화한 조각으로 구성돼 있다. 원래 피우미 분수는 보로미니가 먼저 디자인 한 것이 있었으나 분수 모형을 보고 감동한 교황에 의해 베르니니로 낙착하게 된 것이다. 실망한 보로미니는 나보나 광장에 있는 성 아녜제 성당을 건축하고 67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듯 교황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베르니니는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베르니니는 1598년 나폴리에서 태어나 6살 때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왔다. 8살 때는 교황을 스케치했는데 그의 뛰어난 실력에 놀란 교황은 ‘제2의 미켈란젤로’가 탄생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15세 때는 산 채 뜨거운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를 조각한다. 베르니니는 이 작품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자신의 다리를 불에 부쳐 극한의 고통을 경험한다. 실로 놀라운 노력과 작품에 대한 집념이다.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팔을 불로 지져 고통과 환희의 장면을 ‘성녀 테레사의 환희’ 라는 작품 속에 생생하게 표현했다.

당시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최고 귀족이었으며 거의 모두 엄청난 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베르니니의 손을 빌려 자신의 궁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최고의 궁전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지금도 보르게세 박물관에 가면 다비드, 아폴로와 다프네 등 베르니니의 걸작들이 수 십 점이나 소장돼 있다.

교황과 추기경 등 당대 최고 세력의 보호 아래 있던 베르니니는 어느날 큰 사고를 하나 저지르고 만다. 코스탄차라는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나오던 자신의 동생(루이지)을 쇠몽둥이로 죽을 만큼 두드려 팬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하인을 코스탄차에게 보내 그녀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 버렸다. 코스탄차는 그가 ‘코스탄차 보나넬리의 흉상’이란 작품으로 조각하기도 했던 베르니니가 사랑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유부녀로 베르니니의 조수였던 마테오 보라렐리의 아내이기도 했다. 로마시는 발칵 뒤집혔고 교황은 이 사건에 개입하여 형벌을 내려야 했다. 난도질을 한 베르니니의 하인은 살인미수죄로 감옥행, 간통을 저지른 코스탄자는 간통죄로 감옥행, 갈비뼈가 부러진 루이지는 멀리 도망갔는지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불륜과 폭력을 휘둘렀던 베르니니에게도 형벌은 내려 졌다. 3000 스쿠디의 벌금형이 내려진 것이다. 이는 그가 흉상 하나 정도를 제작하면 쉽게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베르니니를 끔찍히 아낀 교황(우르비노 8세)은 비공식적인 혼인 약속을 받고 벌금형을 철회한다. 혼인 약속이란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카테리나 테치오(22세)’와 베르니니(41세)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베르니니는 결혼에 응했으며 결혼 후에는 불미스런 일들이 다시는 일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11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베르니니는 40년을 더 살았다. 코스탄차의 흉상은 현재 바르젤로 미술관(피렌체)에 전시돼 있다.

글·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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