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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지막 소원은 고향 땅 한번 밟는 것”…가족들과 생이별 65년 MD김주열씨 인터뷰

미주한인에게도 이산가족상봉 기회있기를

“어머니는 아들 만나면 주겠다고 양복 옷감을 20년동안 가지고 계셨어요.“
강산이 여섯번도 더 바뀌었을 세월이지만 어머니를 묻는 질문에 김주열(80세)씨의 눈시울이 금새 붉어졌다. “전쟁이 일어났지만 며칠 후면 어머니를 만날 줄 알았지요. 그렇게 65년을 살았어요.”

메릴랜드 컬럼비아에 거주하는 김주열 할아버지의 고향은 휴전선에 서면 눈 앞에 보이는 경기도 개풍군. 한국군 초소서 불과 20리(약 5마일) 떨어진 곳이다. 중학교 3학년 서울 유학 시절에 6.25전쟁이 터져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고향길이 막히고 얼마 후 군대에 입대했고, 부모와의 재회만 오매불망 기다리다 장가도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4세에 갔다.

외동아들로 자란 탓에 때론 누이처럼, 때론 친구처럼 따르고 사랑한 자신의 어머니를 김씨가 마지막으로 본 건 중학교 2학년이던 1949년 말 겨울방학. 서울로 복귀하기 위해 집에서 20리인 장단역까지 줄어드는 걸음을 아쉬워하며 함께 걷던 게 영영 마지막이 됐다. 김씨는 “어머니와 헤어지기 싫어 손 꼭 잡고 걷던 생각이 납니다. 같이 왔던 길을 혼자 외로이 되돌아가시던 어머니 뒷모습이 생애 마지막이 될 줄이야…”라고 말끝을 흐렸다.

김씨는 2년전 1천만 이산가족위원회 워싱턴지회에 상봉 희망서를 제출했다. 이북에 남아있는 외삼촌의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20년 전에 기적적으로 그간 여러차례 편지를 보냈던 북의 조카에게서 답장을 받았다”며 “왜 이제서야 찾았냐고, 조카가 모시고 있던 내 어머니께서 1년 전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김씨는 “조카가 보낸 편지에 써 있더라. 우리 어머니께서 주열이 만나면 준다고 양복 기지(옷감)를 20년동안 꽁꽁 간직하고 계셨었다고…”라고 말했다.



1978년 도미 후 고향을 보고 싶은 마음에 금강산과 개성을 관광차 다녀온 김씨는 개성 관광 때는 국민학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방문한 박연폭포와 선죽교를 다시 마주하기도 했다. 김씨는 “아주 오랜만에 방문한 곳들이었지만 그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당시 거기에서 한 200미터 거리에 고모들이 사셨었어요”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한국에 갈 때면 늘 도라산 전망대에 들러 고향땅을 그렸지만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미주의 이산가족을 위해 미국 정부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가족 상봉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실향민들의 가족 상봉은 미국 적십자사 등이 나서줘야 한다”며 “이 밖에도 정치적으로 이산가족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 순수한 목적을 가진 단체들이 생겨나 실제적인 미주 이산가족 상봉 추진을 위한 원동력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만약 북녘의 조카를 만나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씨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니가 어떻게 사셨냐’고 묻고싶다”고 답했다.

김씨는 “내 살아 생전 고향 땅을 다시 한번 밟아보는 게 소원입니다”라며 “그런데 저한테도 혹시 (상봉자 명단 포함)가능성이 있을까요?”라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유현지 기자
yoo.hyunji@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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