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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성희롱의 추억

신 예 리 /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

처음엔 너무 어려서 몰랐다. 3학년 언니들이 왜 그 교실에서 줄줄이 울며 나오는지. 나 역시 3학년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늦돼서 그랬는지 그제야 성적 수치심이란 게 생긴 거다. 중학교 시절 아는 제자들이 지나가면 이유 없이 교실로 불러들여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리던 할아버지 선생님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기력이 쇠한 탓인지 때린다기보단 쓰다듬는 쪽에 더 가까웠던 걸로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예전에 멋모르고 당한 숱한 일들이 요즘 기준으로 치면 최소한 성희롱이요 엄밀히 따지면 성추행이다. 그때 그 시절엔 성희롱이 없었던 게 아니라 성희롱이란 말이 없었을 뿐이다. 그 말이 등장하고 나니 비로소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했던 찜찜한 경험들이 무얼 뜻하는지 분명해진 거다.

소름 끼치게 싫었지만 당시엔 대놓고 반발하지 못했다. 내신이나 학교생활기록부 때문은 아니었다. 달랑 연합고사와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들어가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의당 어른 말엔 순종해야 하는 분위기 탓이었을 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최근 불거진 G고교 사태에서 보듯 복잡해진 입시제도로 더욱 공고해진 갑을 관계가 아이들에게 차마 못 견딜 일을 견디게 한다.

대학생인 딸아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딸은 키도 크고 성격도 괄괄한 편이라 다행히 '집중 공략 대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안 좋은 일은 가능한 한 피해야겠기에 학년 초면 담임 교사를 찾아가 조용히 명함을 내밀었다. "평소 딸애와 대화를 아주 많이 해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전해 듣고 있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흔히 아들 가진 부모는 군대 걱정 딸 키우는 부모는 성범죄 걱정에 애가 끓는다고들 한다. 경중을 따져 비교할 문제가 아닌 건 알고 있다. 특히 북한이 야수처럼 도발해온 이즈음 군에 아들 보낸 심정이 오죽할까 싶다. 그래도 군대는 복무기한이 정해져 있긴 하다. 반면 성폭력에 딸들이 노출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는 평생 간다. 생면부지의 범죄자는 밤길 조심으로 막는다지만 학교나 직장에서 아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피해는 어찌해야 할까.

언젠가 모임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남성이 "우리 딸은 직장생활 안 시키고 바로 시집보낼 거다. 쓸데없이 성희롱이나 당할 텐데 뭐하러 밖으로 내돌리나"라는 말을 듣고 어이없던 기억이 생생하다. 평소 회사에서 본인의 언행에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자기 딸은 집에 가둬두겠다는 자백이 아니고 뭔가.

그 집 딸은 굳이 일을 안 해도 되는 형편인지 모르나 수많은 다른 집 딸들은 성범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높디높은 취업의 벽을 넘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 대기업에 인턴으로 들어간 딸아이의 친구는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 벨트를 풀어 여직원 허리에 두르더니 바짝 끌어안고 춤추는 상사의 모습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문제를 제기하려 하자 옆에 있던 선배가 "가만 있으라"고 말려 겨우겨우 참았단다. 이런 회사라도 입사하려고 기를 쓰는 자기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분하단 얘기였다.

지난번 청년 실업에 대한 칼럼에서 "미안하다. 답이 없다"고 썼었다. 한두 가지 대책으론 도저히 풀 수 없는 지난한 문제라 그리 쓸 수밖에 없었다. 이번 문제 역시 해결이 어렵긴 매한가지지만 조심스레 말이라도 꺼내 볼까 한다. 바로 성희롱은 성(性)이 아니라 수(數)의 문제 즉 권력의 문제란 거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아내를 둔 동료에게 들으니 여자가 대다수인 그 직장에선 오히려 남자 직원들이 성희롱을 당한다고 했다. 신참이 들어오면 여자 선배들이 대놓고 아래위로 훑어보며 "쓸 만하네"라며 적나라한 품평을 늘어놓는다는 거였다.

그러니 한쪽 성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현재 우리 사회의 구조를 바꿔 나가면 성희롱 문제도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처벌 강화도 도움이 되겠지만 근본 대책은 아니다. 터키와 인도 등 성범죄로 악명이 자자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턱없이 낮다는 걸 떠올려보시라. 요컨대 성희롱의 해법은 도덕심이 아니라 관계의 평등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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