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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음악가의 삶과 만나다

김평식의 '세계를 가다' 모차르트의 생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장송곡 작곡을 마지막으로 생 마감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 음악가이다.

그는 뮌헨에서 동쪽으로 약 300Km에 위치해 있는 잘츠부르크(Salzburg)라는 작은 중소 도시의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서 태어났다. '이 집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1756년 1월 27일 태어나다'라고 문패에 새겨져 있다.

신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아주 특별했다.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교황 합창단의 연주음악은 당시 교황청 이외의 다른 곳에서의 연주는 일체 엄금하고 있었다. 연주는 물론 악보 역시 교황청이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어 누구든지 이 곡은 복사할 수도 없었다. 턱을 고이고 가만히 앉아 찬양 연주를 듣고 난 모차르트가 집에 돌아온 후 조금전에 들었던 연주곡들을 오선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엄청난 분량의 연주곡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때 그의 나이가 불과 5살이다. 신동이나 천재라는 이름이 그냥 붙여지는 말이 아니다.



수많은 악기들의 음률들을 어린 나이에 어떻게 다 기억해 옮겨 놓는단 말인가.

그 후 교황청은 고민 끝에 처벌보다는 오히려 그의 천재적인 재질을 인정하여 금상 명예를 시사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3살 때부터 키보드를 완숙하게 쳐 나갔고 4살 때부터는 정식 음악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6살부터는 유럽의 여러 나라 궁전과 귀족들을 위한 연주 여행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도 규모가 작은 악단의 지휘자였었다. 아들의 천재성을 알고 난 뒤 악단의 지휘자마저 팽개친 후 일구월심 그만을 보필했다. 자신이 못 다 이룬 음악가의 꿈을 아들을 통해 보상받고자 모차르트와 많은 갈등을 겪기도 했다. 마치 한국 부모들의 지나친 자식사랑처럼 말이다. 우리네 여느 가정에서도 어렵사리 아들 자식 하나 얻으면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 키우는데 세계적인 신동을 낳은 그 부모의 감회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는 아버지의 반 강제적인 강압에 끌려다니며 한 번도 친구들과 어울려 아이답게 놀아보지도 못하고 컸다.

천재 음악가라는 이름이 전 유럽에 알려지면서 명성에 걸맞게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남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유는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은 과소비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그는 1782년 8월 4일 성 스테판 성당에서 콘스탄체와 결혼했다. 성 스테판 성당과 모차르트는 묘한 인연이 있는 양 결혼도 이곳에서 했고 그의 장례식도 여기에서 치렀다.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는 한참 젊은 나이인 35살에 죽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장송곡을 작곡한 뒤에 유명을 달리했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충격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 장송곡인 '레퀴엠(Requiem)'은 전무후무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말이 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늘 인기를 한몸에 받아왔지만 한 인간으로써는 겹치는 불운으로 안타까운 삶을 살았다.

수많은 경쟁 작곡가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왔고 없는 모함도 많이 받았다. 경제적인 압박에 견디기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하기까지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에게 성실한 내조자였다. 밤늦게까지 촛불을 밝혀놓고 옆에서 자리를 지키며 졸음을 물리치고 작곡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모차르트의 처가는 볼프강 호수가 있는 장크트길겐(Sankt Gilgen)이라는 마을이다. 알프스 산 자락에 가려있는 그림처럼 풍광 좋은 호숫가의 저택인데 장인은 이곳 도시의 시장이었다. 그래서 그의 본명에도 볼프강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듯하다.

이번 필자의 여행에서는 모차르트가 출생한 집에서 시작해 그의 평생 살았던 집과 그의 처가, 결혼식과 장례식을 한 성당과 그가 묻힌 중앙공원 묘지까지 일대기를 두루 다 본 셈이다.

그가 죽은 뒤 지금까지 억조창생이 지났는데도 그만한 인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면 그의 천재성이 얼마나 신기에 가까웠는지 실로 가늠하고도 남는다.

오죽하면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모차르트에 대한 평을 일체 거부했다. 그 이유는 "오직 그를 숭배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문의:(213) 736-9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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