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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북한과 비슷? 오히려 한국과 닮았다"

여행 가이드 펠리페가 본 남과 북

쿠바 양성 한국어 통역관 1호
북한 주재 쿠바대사관서 근무
한국에선 연세대 어학당 공부
김일성 3~4차례 통역 경험
쿠바엔 현존 사람 동상 없어
밀입국 실패자도 처벌 안해
일할 때와 놀 때도 화끈하게
이민자들 성공 공통점 많아


한류로 한국인에 호감 쑥쑥


북한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나라가 쿠바다. 서로 형제국이라고 칭할 만큼 외교관계가 돈독하다. 그래서 쿠바는 북한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쿠바에 대해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은 실제와는 많이 달랐다.

여행 가이드 펠리페 이슬라(58)씨는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적임자다. 그는 쿠바가 양성한 1호 한국어 통역관으로 김일성 대학에서 유학하고 북한 주재 쿠바대사관에서 근무했다. 한국에선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공부하고 살았다. 남북을 다 경험한 그는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면서 "쿠바와 닮은 쪽은 오히려 한국"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우리말로 했다. 그는 노랗다와 누렇다의 어감차이까지 구별할 정도로 한국어에 능숙하다.

-한국어는 언제 어떻게 배웠나.

"한국어가 좋아서 배운 것은 아니다. 1972년 정부가 최초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언어대학 지원자를 모집했다. 당시 열 여섯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진학 대신 언어대학을 선택했다. 입학해보니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인기 과목은 정원이 다 찼고, 남은 언어가 '조선어'밖에 없었다."

-북한에 여러 차례 갔다.

"76년 언어대학 졸업자 중 최우수 학생 6명을 북한 김일성 대학에 유학 보냈는데, 그때 뽑혀 처음 북에 갔다. 쿠바와 북한은 '형제'관계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한국어 통역관이 필요했다. 78년까지 2년간 북한에서 유학하고, 84~85년과 90~94년 2차례 북한 주재 쿠바대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북한 생활을 돌아본다면.

"처음 갔던 76년은 북한이 잘 살 때다. 유학생 기숙사에서 살면서 불편한 점이 없을 정도로 풍족했다. 하지만 그후 대사관 근무 시절에는 연료가 부족해 겨울이면 항상 떨었다. 또 대사관 직원들은 외부와 단절돼 살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과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여가시간엔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대동강변에서 동료들과 고기를 자주 구워먹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72년 김일성 대학 도서관에 처음 갔을 때다. 마르크스, 레닌의 사회주의 관련 서적이 한 권도 없었다. 대신 주체사상 책만 가득했다. 그때 알았다. 북한의 이념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북한과 쿠바는 비슷하다고 알고 있다.

"야당이 없고,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한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그외에는 전혀 다르다. 쿠바엔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이 없다. 평양에 살 때 모란봉경기장(현재 김일성 경기장)에서 태양절(김일성 생일) 축하행사에 동원된 아이들의 공연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쿠바에선 카스트로를 우상화하지 않는다. 또, 최근 스페인 기자가 몰래 촬영한 북한 다큐멘터리가 쿠바에서 화제가 됐는데, 탈북자 총살장면이 담겼다. 쿠바에선 미국으로 밀입국자의 가족에게 책임을 묻거나 밀입국에 실패해 돌아온다 해도 벌을 주지 않는다. 사는 건 자유롭다."

-김일성 주석을 봤나.

"3~4차례 통역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카스트로 생일에 대사관에 찾아와 연회를 베풀었을 때다. 카리스마가 강했고 웃으면서 하는 말들이 재치있었다. 럼주를 무척 좋아했는데 주치의의 만류에도 그날 술잔 가득 따라 5~6잔을 마셨다. 건배사는 '내 친구 카스트로의 만수무강을 위하여!'였다."

-한국엔 언제 갔나.

"96년 연세대학교 어학연수차 3개월 있었고, 98년 2차례, 2004년에도 한 달 다녀왔다."

-한국 하면 생각나는 건.

"어학연수기간이 7~9월이었다. 여름 방학인데도 대학 도서관이 학생들로 가득했다. 교육열과 치열한 경쟁에 놀랐다. 쿠바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한국 국민에 대한 인상은.

"쿠바 국민과 비슷했다.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놀 때 화끈하게 논다. 둘 다 주변 큰 나라들 사이에서 고생한 역사 때문에 자존심이 세고, 투항하지 않는다. 이민사회 성공도 공통점이다. LA한인사회처럼 마이애미에 쿠바커뮤니티도 크게 성장했다."

-남북간 포격전이 있었다.

"알고 있다. 남북 관계는 말하기 조심스럽다. 다만, 남북 통일은 한반도의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다. 우리 속담에 '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지만 벌레도 들어온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통일이라는 시원한 바람을 위해서라면 작은 문제들은 감수해야 한다는 뜻)"

-쿠바 정부가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됐다. 쿠바 혁명은 실패한 건가.

"혁명은 분명히 필요했다. 인종차별, 교육, 의료, 문화 모든 면에서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어진 앙골라 등 해외파병으로 국민의 살림살이가 더 어려워졌다. 또 장기집권은 가장 큰 실수다."

-쿠바인들의 강점은.

"우린 어려울수록 낙천적이고 실망하지 않는다. 1990년 소련 붕괴로 최악의 경제 시기를 맞았을 때 팥죽과 빵으로 연명하면서도 쿠바인들은 유기농을 발전시켰다. 우린 지금도 매일이 위기지만, 불평하지 않고 산다. 한마디로 쿠바인들은 위기 때 더 세련된 사람들이다."

-쿠바에 오는 한국인들 가이드를 전담하다시피 한다던데.

"이름이 좀 알려져서 그런 평가를 듣나보다. 연평균 내가 맡는 한국 방문객이 100팀 정도다. 윤상현, 손예진 같은 연예인도 안내했다. 이만섭 국회의장이 쿠바 방문시(2001년 4월) 피델 카스트로와 면담을 했는데 그때도 통역을 맡았다."

-가족은.

"중국인 아내와 아들 하나를 뒀다. 최근 배달전문 중국 식당을 열었다. 반응이 좋다. 아직 쿠바에는 배달 문화가 자리 잡지 않아서 발전 가능성이 크다."

-한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쿠바에 부는 한류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 대해 호감이 크다. 좋은 이미지를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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