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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전 선인장 밭에서 "대한독립만세'

빗장 풀린 쿠바를 가다…에네켄 한인들의 독립운동
임천택씨가 쓴 '큐바 이민사'…생생한 역사

멕시코서 건너와 궁핍하게 살았던 300명
끼니 굶어가며 독립자금 모아 임정 보내
41년 '노동정지' 날벼락…미주한인이 도와


쿠바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미국과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면서 '금단의 땅'이 '기회의 땅'으로 급변하고 있다. 쿠바는 에네켄 한인 이민 선조들의 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북한과는 오랜 우방관계를 맺고 있는 쿠바. 본격 개방을 앞둔 쿠바의 현지 표정을 정구현 기자가 직접 살폈다. 광복70주년 특별기획 '빗장 여는 쿠바를 가다'를 연재한다.

92년 전 1923년 3월1일. 쿠바 아바나 동쪽 마탄사스주 엘볼로 지역 선인장 농장.

검게 탄 까만 얼굴 일색의 한국인 300여 명이 손수 그린 태극기를 들고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선언한다." 비장했다.

4년전(3.1절) 한반도를 뒤흔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태평양을 건너 카리브해 날카로운 선인장 농장에서 출렁였다.

에네켄 2세 임천택(1985년 작고)씨가 1953년에 집필한 '큐바 이민사'에서 묘사한 작지만 큰 사건이다. 임씨는 쿠바 한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1905년 두 살때 홀어머니와 함께 인천항에서 멕시코 유카탄행 배에 오른 1033명 중 한 명이다. 그는 18세가 되던 1921년 유카탄에서 다시 쿠바로 2차 이민을 떠난 에네켄 300명에 포함됐다.

쿠바 한인회, 청년회, 한글학교를 창립했고 독립자금 모금을 주도했다. 그의 자녀 9남매 중 장남 헤르니모(2005년 사망)씨는 체 게바라의 혁명군에서 활동했고 쿠바 한인으로선 최고위직인 식량산업부 차관까지 지냈다.

쿠바 한인 밀집촌이 있는 마탄사스주에 사는 임씨의 딸 마르따(77)씨를 찾아갔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큐바 이민사' 초판본부터 공개했다. 32페이지 책에는 이민 동기, 과정, 이민 후의 삶, 단체 결성, 생활상 등을 세세히 담겨있다. 멕시코 1차 이민 동기로 임씨는 "묵국(멕시코)에서 4년만 기한을 채우면 금은동화를 한짐씩 짊어지고 안락생활을 할 수 있다는 풍문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막상 멕시코 유카탄에 도착하니 "금전 저축은 고사하고 그날 그날 생활도 곤란하고 4년 계약에 팔린 몸"이 되었다면서 "쓰라린 눈물로 다만 마음의 눈으로 고국의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궁핍한 유카탄 한인사회에서 희망 이야기가 돌았다. 쿠바는 설탕 한 근이 20전이나 나가는 '백색(사탕수수) 황금의 땅'이라는 얘기였다. 1033명 중 300명이 쿠바로 2차 이민을 떠났다. 쿠바 한인의 시초다. 1921년 3월 20여 일만에 쿠바 마니티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 꿈은 깨졌다.

20전이던 설탕값이 2전으로 폭락했다. 매주 일당은 2달러로 한사람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돈이었다.

"생각만해도 몸서리치는" 빈곤한 삶속에서도 그들은 조국을 잊지 않았다. 땡볕 사탕수수밭에서 하루종일 번 돈을 아껴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임씨는 "1945년 광복될 때까지 8년간 총 1489원15전을 송금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246원5전은 아바나 중국인 은행을 경유해서 중경에 있는 김구 선생에게 직접 부쳤다"고 적었다. 당시 송금에 동참한 에네켄은 30명이었다. 서른 가정이 평균 50원씩 분담한 셈이다. 한 가정당 400~500원씩 빚을 지면서 힘겹게 살던 때였다.

마르따씨는 "에네켄들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독립자금을 만들 수 없었다"면서 "아버지께서 생각해내신 모금 방법은 쌀이었다. 끼니 때마다 밥을 짓기 전 가족 한 사람당 한 숟가락씩 쌀을 덜어내 그 쌀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하셨다"고 회상했다. 에네켄들은 이역만리에서 빚을 지고, 끼니를 줄이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다.

그들에게 고난은 일상과 같았다. 이민 20년만에 쿠바의 불안정한 정세가 에네켄들에게 최대 위기를 몰고왔다. 1941년 190일간 '노동정지(파업)' 시기가 찾아왔다. 대부분 하루 벌어 그날 먹고 살던 그들은 반년 넘게 돈 한푼 만지지 못했다.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했던 에네켄들에게 힘이 된 건 미주 한인들이었다.

임씨는 "노동이 영영 정지되어 생사조차 가늠할 수 없을 때 4개 미주 국민총회에서 2000여 원의 성금을 보내줘 그 은공을 영원히 잊지 않고 있다"면서 "특히 오리건주 장라득씨는 70여세 고령으로 신체 불건강중에서도 수차례 구조한 금액이 400여 원에 달해 쿠바 동포의 은인으로 인증하는 바이다"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가 남긴 독립금과 지원금에 대한 기록은 상해임시정부, 에네켄, 미국 한인들을 잇는 지원금의 선순환인 셈이다.

임씨가 기록한 책 '큐바 이민사'엔 인구조사 기록도 적혀있다. 1921년에 쿠바로 건너온 에네켄 300여 명중 1953년 여름까지 32년간 103명이 죽었고, 123명의 새생명이 태어났다.

그후 62년이 흐른 2015년 에네켄의 수는 1099명이다. 94년전 생존과 싸우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은 한국인의 후예들이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이들은 16일에 광복절 행사를 개최한다. 에네켄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을 기억하는 날이다. 쿠바 한인회장 안토니오 김(72)씨는 "이번 행사에 참가하겠다는 한국의 정치인은 없다. 또 1099명의 에네켄 중 한국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초청받은 이도 없다"고 했다.

92년전 사탕수수밭 위 에네켄들이 외쳤던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여전히 외롭다.

쿠바 마탄사스=정구현 기자

☞에네켄:용설란의 일종으로 선박용 밧줄의 원료로 쓰이는 선인장을 스페인어(henequen)로 에네켄이라 한다. 100여 년 전, 멕시코 등 중남미로 건너간 한인 이민 1세들이 에네켄 농장에서 일한 것을 두고 이곳 한인들을 에네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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