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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수기]정구창 예비역 육군 소령

1220 고지에서 단 중위 계급장

나는 인천공업학교 6학년 재학 중 6.25를 맞았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정말 놀랐다. 이틀이 되니 북한 괴뢰도당 인민군이 우리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경인도로를 따라 초가집채만한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했다. 벌써 길거리는 힘대로 짐을 이고진 피난민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집주인 아저씨와 다락방에 기어들어가 밖에서 전해주는 소식을 들으며, 끼니마다 디밀어주는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죽은 듯이 지내고 있었다.

인민군이 인천에 들이닥치자 동내 보도연맹원과 인민군이 짝을 지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요직에 있던 사람들을 잡아가며 젊은 사람, 일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끌어갔다. 이대로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언제 나도 끌려갈지 알 수 없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다락방을 나와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군포 시골집까지 밤새 인적을 피하여 도착했다.

낮에는 약 400m되는 수리산 숲에 친구와 함께 은신하여 숨었다가 밤이면 인근 수수밭으로 피신하곤 했다. 이때 미군 전투기가 쉴 시간이 없이 적진을 폭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계속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대낮에 주안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몇몇 학교 친구들과 학도병으로 입대하자고 집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왔다.

화물 열차를 타기도하며 트럭에 매달리기도 하며 고생 끝에 경남 통영에 도착하여 군에 입대하고 보니 그곳이 국민방위군 훈련소였다. 우리는 도착 즉시 부대에 편성되어 매일 고된 훈련을 받던 중 뉴스를 들었다. 아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했는데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전쟁에 개입하여 전황이 불리하여 후퇴를 하고 있다는 비보였다. 이때 우리는 국민방위군의 처사가 옳은 처사가 아니고 온갖 부정과 비리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밤에 훈련소 담을 넘어 도망을 쳤다.
그길로 우리는 부산으로 왔다. 그리고 육군 간부후보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시했다. 운이 좋게 모두 육군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에 19기생으로 합격하여 동래여고 및 동래 중학교 등에서 고된 훈련을 받으며 단기 교육을 받았다. 이때 학교 주변에 있는 A고지 B고지를 팬티만 입고 무장을 하고 오르내리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M1소총에 프린트 두꺼운 교재, 식기도 엉덩이에 차고 구보로 교육장으로 군가를 부르며 뛰어가려면 숨이 목에 차서 금방 쓰러질 것 같은 호된 훈련을 마치고 1951년 7월 7일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누런 소위 계급장을 단 우리를 소모품 소위라고 불렀다. 전장에서 소모품 같이 없어진다는 은유였다.

소위로 임관된 후 대구 육군본부에서 각 부대로 보직특명을 받고 전선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나는 7명의 동기생 소위와 함께 보병 제7사단에 배치되어 정보참모 및 작전참모의 작전상황을 인지한 후 사단장에게 신고하고 즉시 사단 예하 3. 5. 8연대로 배치되고 나는 8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명 받았다. 수색중대를 찾아 가니 병력은 천막에 수용되었고 장교는 중대장 1명 뿐이었다. 수색대는 늘 위험이 따른다. 언제나 적진을 수색하고 탐색하기 위해서 늘 최전방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많은 사상자를 낸다. 언젠가 선발된 병력을 인솔하고 임무수행 중 외딴 초가집을 수색하는데 중공군 시체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인민군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시체에서 썩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며 파리 떼가 시체를 덮고 있는 끔찍한 현상도 목도할 수 있었다.

수색임무를 띠고 적진에 뛰어들 때는 항상 뒤에 남은 부대가 부러웠다. 그러던 중 전남 광주에 있는 육군 보병학교 초등군사반 교육명령을 받고는 하늘을 날 듯 기뻤다. 4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원대복귀하니 우리 사단은 다른 사단과 임무교대 되어 양구 북방 1220고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 1220고지에서 중위로 진급되어 중대 선임장교로 근무 중, 강원 양양에 신설되는 제11사단의 20연대 3중대장으로 전출돼 복무했다.

우리 중대원 대부분은 논산과 제주훈련소에서 훈련받고 배출된 신병들이어서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형편없는 병졸들이었다. 이들을 진중에서 훈련을 시켜 철원 북방의 펀치볼에서 그 유명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나는 전쟁 중 부하들을 사지에 보내고 많은 부하의 부상으로 가슴 아파하며 가슴을 앓고는 했다. 다행히 7월 27일 휴전으로 인해 포성이 멈추고 나도 전역하여 남은 여생을 미국에서 평안히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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