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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수기]내가 겪은 6.25 김랑기 예비역 하사

요충지 경남함안 전투 투입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 치열

나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된 해, 초등학교 6학년 때 모국인 한국 전남 보성에서 살았다. 18살 때 친구 3명과 육군 제15연대에 자원 입대했다. 15연대는 당시 여순, 순천 반란을 일으킨 제4연대의 명칭을 개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남 여수 신월리에서 3개월가량 훈련을 받고 있을 때 6.25가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쪽에서 피난민들이 쏟아져 내려오면서 곧 북한 김일성의 인민군이 여수, 순천에 들이닥친다는 긴박한 소문이 들려왔다.

우리는 상관의 명령으로 군함에 실려 어두운 밤에 여수항을 떠나서 행선지도 알지 못하고 밤새 해상을 떠돌았다. 날이 새어 주위를 보니 우리가 떠난 여수 부두 근방이었다. 우리가 탄 배는 다시 여수 부두에 돌아와서 군량미를 싣고 9시 경에 다시 여수를 떠나, 높은 파도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를 헤치며 부산 방면으로 향했다. 거제도를 지날 무렵 춥고 배 고프고 구토가 나며 현기증이 나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부산 부두에서 하선하여 부산 사상, 구포지역에 주둔했다. 이때 미군이 UN군으로 부산항에 상륙하였다. 이때 우리 연대 1.2.3대대 중, 내가 소속해 있는 3대대는 미25사단(맥아더부대)에 편입하게 되었다. 우리 국군이 입던 누런 광목 군복과 국산 농구화를 벗어던지고, 미군 사지복에 군화 철모를 쓰고, M1, 칼빈총으로 새 무장을 하니 정말 군인답고 전쟁에 승리할 용기가 생겼다.

우리 UN군은 곧 경남 함안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지역은 아주 중요한 요충지이였다. 산만 넘으면 바로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는 지점이었다. 쌕쌕이 호주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하며, 낮에는 우리가 점령하고 밤이면 적에게 내어주기를 여러 번, 피아가 사력을 다하여 예광탄, 수류탄을 있는 대로 쏘고 던지고, 시체가 수 없이 너부러지고, 이때 여자 인민군도 전투에 투입된 것을 보았다.



간밤에 적에게 고지를 내어주고, 다음 날 미명, 날이 밝는 것을 기하여 우리는 다시 총공격을 시작했다. 인민군도 있는 화력을 다 퍼붓고 있었다. 포연이 하늘을 찌르고 앞이 보이지 않고, 바로 앞에서 터지는 포탄에 병사가 하늘에 공중제비를 하다가 떨어져 죽어 갔다. 나도 순간 하늘에 치솟았다가 떨어졌다. 정신 차리고 다시 돌격하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미스타 킴!”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뒤 돌아보니, 흑인 선임하사 워커 상사였다. 그는 내게 괜찮느냐고 물었다. 나는 “OK”했다. 그는 내게 다가 와서 내 철모를 벗어보라고 했다. 내가 철모를 벗어보니 철모 정면에 주먹 만 한 파편구멍이 뚫려 있지 않는가? 천우신조였다. 머리만 한 주먹 빠지고 아무데도 상한데가 없었다.

우리 부대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쉴 틈도 없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로 전진을 했다. 이때 인민군 패잔병들이 교복을 입은 어린학생들의 등 뒤에 총을 겨누고 인질로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나와 우리 부대원들이 이들을 제어하고 무기를 빼앗고 포로로 후방에 인계했다. 계속 전진하여 가다가 산기슭에 숨어 있던 인민군 박격포단 발사로 나는 왼쪽 발목에 큰 부상을 입고 즉시 마산 야전병원으로, 또 거기서 부산 제5육군병원으로 또 제15육군병원으로 전전하면서 치료를 했다.

약3개월간 치료를 받다가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대복귀를 하기 위하여 퇴원하여 부대를 찾아 기차편으로 경기도 안성에 있는 부대를 찾아갔다. 한미 전우들이 기뻐하며 끌어안고 환영하며 여간 반가워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 시민들이 미국군인 입성을 정성을 다하여 환영하며 만세를 불렀다. 나는 덩달아 승리하고 귀환하는 용맹한 군인인양 사기충천했다. 이렇게 정들었던 미군이 임무 기간이 완료되어 다른 부대와 업무 인계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이때 우리는 한국군에 편입하게 되어 나는 한국군 제9사단 창설 요원으로 전보되어 수색대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계룡산 패잔병 소탕작전을 1달 정도 했다.

다시 우리 부대는 강원도 인제. 금화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때 우리 부대가 처음으로 중공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나는 이 때 중공군의 전법과 인해 전술에 경악했다. 아군이 경계하고 있는 달빛 고요하고 정적한 고지에 숨을 죽여 포위하고 갑자기 요란한 말 발굽 소리에 꽹가리를 치다가 또 구슬픈 피리소리로 조용히 사람의 심금을 심란케 하고는 장총, 따발총,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기습하는 전술로 우리를 포위했다.

열세에 몰린 우리는 또 새벽 2~3시경에 좁은 골짜기를 퇴로로 삼아 후퇴를 하는데,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고 저마다 먼저 탈출하려고 정말 아비규환이었다. 날이 새기 전에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가야 산다. 사생결단으로 후퇴하면서 앞서 넘어진 전우를 그대로 밟고 차량도 그 위를 깔고 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나도 기를 쓰고 겨우 신작로까지 탈출에 성공을 했다.

날이 밝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거센 포격은 더 불을 뿜었다. 결국 나는 적의 포탄을 맞았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가 정신을 차려 다시 움직이려 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뒷머리가 이상한 것 같아서 손을 대 보니 뒷머리 목뼈 위에 붉은 선지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하여 길 가로 기어갔다. 이 때, 이미 손과 발은 동상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고 죽기 직전에 후퇴하던 아군 스리쿼터에 실려 천막 야전병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거기서 다시 대전에 있는 병원으로 보내졌고, 대구 제1육군병원으로 옮기며 치료했다. 야전병원에 와서도 죽어가는 전사들도 많았다. 약이 없고 굶어죽는 병사들도 많았다. 마취 없이 팔다리를 절단함으로 고함을 지르며 고통하는 병사들도 수 없었다. 나는 중상이었다. 주먹만한 구멍이 뒷머리에 뚫려져 있었다. 의료진이 내 군복을 벗기려 했으나 피가 군복에 응고되어 벗길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전혀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1개월 간 계란으로만 연명했다. 나는 다시 울산 23육군병원으로 옮겨 6개월간의 병원생활을 했다. 거의 반신 불구자가 되어 계속 군 복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결국 불구자가 되어서 1951년 7월 상이용사로 명예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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