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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8.15가 돌아오면 다시 그리운 사람

김령의 퓨전에세이

한 20년 전쯤 이승만 전 대통령 영부인 후란체스카 여사의 유품전이 열렸었다. 그 유품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찌르는 화살촉 같았다고 전한다. 소매와 솔기가 달아빠진 하늘색 투피스가 40년 동안 퍼스트레이디가 가졌던 단 한 벌의 예복이었다니 말이다. 31년 동안 썼다는 우산, 연필깍지를 끼운 몽당연필, 기운 스타킹, 여덟 번이나 창갈이를 한 구두…. 하와이 여행길에서 그들의 망명지를 지날 때 나도 마음 슬펐었다.

좀 늦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운동이 시작된 것은 다행이다.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몇 년 후면 100년이 된다. 그 임정이 이승만 박사에 의해 합법정부로 세워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의 임기 마지막 10년이 그를 독재자의 늪에 빠뜨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야성명을 내고 하와이로 떠나가던 그의 마지막 길, 어린 나도 울었다. 이승만에게는 과실보다 공이 크다. 오늘 국부 대접을 해야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그는 중죄인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됐었다. 그 안에서 기독교적 삶을 알게 되었고 정치혁명과 더불어 문화혁명도 필요함을 절감해 민족자주, 자유민주, 복지국가, 민족통합이라는 4대 경국경륜을 천명했다.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표’를 내건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만든 사람이다. 조국사랑에 그보다 앞선 정치인은 얼마나 될까. 정치자금이나 축재에도 그는 지극히 청렴했다.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미국과 과감히 맞서 주권을 행사, 반공포로 석방을 했다. 지금 같으면 노벨평화상감 아닐까? 현해탄에 이승만 라인을 긋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 선언하며 대마도 반환을 요구, 일본을 쩔쩔 매게 했다.

그에게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 면에서 붙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운동단체 ‘독립협회’를 만들었다. 1894년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그의 나이 24세에 창간했다. 그는 또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프린스턴대에 제출한 논문 ‘전시 중립국론’은 1910년 프린스턴대 출판부에 의해 발간되기도 했다. 또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1941)를 출판,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이승만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협성회보에 1893년 3월9일 ‘고목가’(Song of old tree)라는 시를 실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보다 10년을 앞선 시다.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책이기도 하다. 영어를 배운 지 2년 만에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이라는 유창한 영어연설을 한 인물이다.

100여 편의 한시(漢詩)도 남겼다. 서예와 동양화에도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내가 다닌 여학교의 새로 지은 강당에 내려 주었던 ‘상아당(象牙堂)’ 현판 휘호는 내가 본 휘호 중 아직도 으뜸이다. 효창 초등학교 시절 그의 탄생일에 즈음, 전교생이 가졌던 글짓기대회도 아름다운 추억이다.

아부꾼 보좌진들의 말을 너무 믿지 말고 1960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역사에 독재자로 남지는 않았으리라. 머잖아 8월15일, 다시 해방 70년을 맞으며 그만한 대통령이 또 있을까 하는 아쉬운 연민은 나만이 가지는 그리움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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