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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

곽노은과 함께 떠나는 낭만의 여행
이탈리아 동부 라벤나

로마시대와 중세 유럽 귀족들의 삶에는 곳곳에 예술이 스며들어 있다. 그들의 일상에서 예술을 분리해내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다. 유럽인들은 무덤을 치장하는 데도 예술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꼽는 무덤은 누구의 무덤일까? 그것은 바로 이탈리아 동부의 라벤나라는 마을에 위치한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Mausoleum of Galla Placidia)’다.
 
가로와 세로가 같은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을 한 이 무덤은 AD 430년에 만들어졌다. 흙벽돌의 평범한 외부와 달리 무덤 내부는 첫눈에 절로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하다. 1600년 전 건축됐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생생하고 찬란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화가 반 고흐가 이 무덤을 꾸미는 작업에 참여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이 천장 벽화를 수놓고 있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석관(Sarcophagus) 윗면에는 화형 당하는 성 라우렌시오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혹자는 모자이크의 주인공은 성 라우렌시오가 아니라 ‘성 빈첸치오’라고 주장한다. 4세기 말 사라고사에서 태어난 성 빈첸치오는 황제에게 잘 보이려는 다치아노 총독에 의해 크게 박해 받은 성인이다. 총독은 그를 석쇠에 올려 놓고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또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를 바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총독은 성 빈첸치오가 순교한 뒤에도 그를 욕보이려고 유해를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파도에 의해 시신은 다시 육지로 떠밀려 왔고 신자들은 찬미 속에 그의 유해를 정중히 매장했다.
 
이 모자이크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바람에 휘날리는 성인의 옷이다. 정말 실감나게 묘사됐다. 바퀴 달린 그릴도 당시 고문기구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무덤에 함께 안치돼 있는 발렌티아누스 3세 석관에는 두 마리의 숫사슴이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광경이 묘사돼 있다. 이것은 시편 42장 1절의 성경 말씀을 라벤나의 예술가들이 모자이크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대리석 벽과 천장 모자이크 맨 아래의 뤼네트(Lunette)에는 선한 목자 예수님과 양들의 모자이크가 있다. 뤼네트는 천장과 벽이 만나는 곳에 만든 반달 모양의 창 또는 공간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들고 바위에 앉아 있는 목자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임을 보여준다. 한 손으로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양을 쓰다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도 아주 자연스럽다. 수염 없는 예수님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상상했던 머리가 긴 젊은 예수님을 그려낸 것이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 규모는 아주 작지만 사진 촬영과 감상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영묘에 들어간 관광객들은 규정상 5분 이상 머물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덤이라는 형태를 빌어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적 작품을 남긴 갈라 플라치디아라는 여인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녀는 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딸로 태어나 메디올라눔(지금의 밀라노)에서 성장했다. 자랄 때의 별명은 ‘메디올라눔에서 가장 고귀한 소녀’였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이복오빠가 있었다. 큰 오빠는 훗날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아르카디우스, 작은 오빠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다. 서고트족의 알라리크(Alaric I)가 로마를 침공한 것은 AD 410년. 서고트족은 게르만족의 일파로 지금의 스페인과 프랑스 지역에 살던 민족이다. 당시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에, 황제의 여동생 갈라 플라치디아는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로마를 함락한 알라리크는 사흘동안 도시를 약탈한 후 인질들을 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인질들 가운데 갈라 플라치디아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알라리크는 원정 도중 코센차라는 곳에서 수재를 당해 급사했고 부하들은 게르만의 풍습에 따라 그의 장례식을 치렀다. 알라리크의 후계자로 추대된 사람은 그의 처남인 아타울프(Ataulf). 서고트족의 새 지도자가 된 아타울프(당시 36세)는 인질인 갈라 플라치디아(당시 22세)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414년 결혼했고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갈라 플라치디아의 아들은 안타깝게도 유아기에 사망했고 얼마 뒤에는 아타울프 마저 측근으로부터 피습당해 죽게 된다. 다행히 아타울프의 유언으로 갈라 플라치디아는 풀려나 로마제국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후에 콘스탄티우스 장군과 결혼해 다시 아들을 얻었다. 이 아들이 바로 425년(당시 6세)부터 455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통치한 발렌티아누스 황제(Valentinian III)다.
 
425년 갈라 플라치디아는 모후(母后)의 자격으로 서로마를 다스리는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12년간의 섭정 기간 중 교회를 건축하고 라벤나 예술을 세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는 그녀의 명으로 건축된 산타 크로체 성당과 연결돼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그러나 산타 크로체 성당은 이후 파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만 남아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글·사진=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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