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광장] 6·25 지게부대와 소년병
이재학/ 6·25 참전유공자회 육군부회장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전선에 보낸 자식과 남편을 생각하며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기원하는 피에 얼룩진 국민의 가슴에 불을 붙인 애절한 시의 한 구절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우리 군엔 없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1개월 2일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북한군의 남침공격은 일일 평균 10km의 속도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그곳에서부터는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대구마저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였다. 이후 남침 82일만인 9월 15일 이후에는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그들의 남침기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전쟁 중 우리 국군은 기존병력 10만5000명에 보충병력 약 77만 명 등 87만명이 참전했고, 이 중 15만7000명이 전사나 부상, 실종을 당했다. 국민의 심금을 울린 영화 '포화속으로'로 잘 알려진 학도의용군의 경우 20여만 명이 참전해 전후방에서 전투와 선무활동을 전개했고, 심지어는 18세 미만의 소년들도 소년병의 이름으로 참전하여 호국의 별로 산화했다. 뿐만 아니라 30여만 명의 어르신들은 지게부대를 편성해 지게를 지고 식량과 탄약을 포화 속 고지로 실어 날랐고, 여학생들도 간호사나 선무공작에 자원하여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이토록 6·25는 전 국민이 함께 참전한 전쟁이자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조국수호에 앞장선, 그야말로 장엄하기 그지없는 애국의 기록, 호국의 전과라 할 수 있다.
자유와 평화를 거저 얻은 나라는 없다. 평화를 누릴 힘은 전쟁을 두려워 하지 않는 국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는 병역을 기피해도 호국은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 지금 한반도 북녘엔 핵무기와 미사일, 방사포와 탱크 그리고 붉은색 집단의 전쟁광 행렬을 자랑하는 북한이 있다. 거기에 김정은의 세습정권은 폭정과 숙청으로 미숙아의 권력을 지탱하고 있다. 근위 호위 군대마저 기아에 허덕이고 인민군 군관은 조금이라도 더 뇌물 챙기기에 열을 올리고 병사는 탈영하거나 민간을 상대로 마약에 노략질까지 한다는 것이 최근 탈북자들이 증언한 막바지 북한의 실상이다.
6·25는 조국 수호를 위해 국민 모두가 직접 전투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고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야 했던 체험의 역사 그 자체다. 이것이 6·25 65주년을 맞는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며 유비무환의 진리를 되새겨 호국안보 정신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하는 이유다. 군은 조국의 간성, 국군아 충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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