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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산책] 반기독교 운동의 시작

옥성득 교수/ UCLA 한국기독교학

1882년 한미조약 이후 정부는 개신교 병원과 학교의 설립을 허락했다. 그러나 보수 양반들은 정통 주자학을 지키고 이단 기독교를 배척했다. 임오군란 이후 서울에 주둔하던 청군의 원세개는 보수파와 손잡고 미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반기독교 서적을 퍼트리고 선교사들이 어린이를 유괴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1886년 언더우드 목사가 서울 정동에 고아원을 개설하자, "소년들을 미국에 노예로 보낼 것이다", "살지게 먹여서 잡아먹을 것이다"라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

1888년 6월 어린이 몇 명이 실종되자 선교사들이 구워 먹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선동된 주민들이 선교사 주택 방화와 살해 계획까지 세우고 거리에서 협박까지 하자 미국공사는 선교사들에게 서울을 떠나 제물포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고종은 유괴범과 유언비어 날조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교지를 내렸다. 방이 나붙고 강력한 단속이 시행되었다. 결국, 소동은 6주일 만에 가라앉았다.

영아소동의 결과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고, 선교사의 지위가 보장되고, 선교의 자유도 일정 부분 주어졌다. 이후 10년간 여러 차례 반기독교 운동이 일어나지만 대부분 외국공사관의 개입으로 해결되었다. 선교사가 지방관리보다 힘이 센 양대인으로 인식되자, 그들에게 빌붙어서 사욕을 채우려는 쌀 신자들이 늘어났다.

초대 교회는 주류 기득권 세력의 반대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기 위해 귀신, 우상, 조상 숭배를 금하고, 축첩, 조혼, 음주, 노름, 아편을 금지했다. 나아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저항했다. 교회는 부도덕과 불의와 전투하는 대안공동체가 되었다. 그러나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가라지 쌀 신자도 공존했다. 그들의 비도덕적 행동과 집단이기주의로 교회는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가라지가 늘어난 오늘, 교회의 알곡은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교회 밖의 문화와 타종교를 이해하는 진지한 노력으로 반대를 줄이고, 불의와 싸우는 용기로 체질을 강화하고, 내부의 악을 정화하는 인내와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때이다.

sungoa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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