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1968년 볼티모어 폭동
킹 목사 암살에 흑인들 분노
폭력시위에 연방군 투입…5500명 체포
볼티모어 시위가 폭동으로 변한 건 암살 이틀 후인 6일부터였다. 6일 낮까지만 해도 300여 명이 평화적으로 킹 목사 추모행사를 벌였으나 저녁이 되자 1000여 명의 군중이 결집, 건물 창문을 부수고 방화하는 등 폭력적으로 변했다. 토마스 디알레산드로 볼티모어 시장은 주 방위군 6000명을 요청, 주류와 총기 판매를 금지했다. 주 방위군 사령관이었던 조지 겔스톤 소장은 1900명에 달하는 주와 시 경찰에 대한 지휘권도 받았다. 오후 11시까지는 귀가하라는 통금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폭력시위를 막지 못하자 스피로 애그뉴 메릴랜드 주지사는 이날 오후 8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연방군 투입을 요청했다. 이날 밤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모든 현장 상황은 대통령이 직접 지휘했다. 볼티모어 폭동 현장에 투입된 군·경 인력은 가장 많았던 9일으로 1만1570명에 달했다.
7일 오전 백악관으로 전달된 보고에 따르면 밤사이 다섯 명이 숨지고 404명이 체포됐다. 백인 시위대가 맞불 시위를 벌여 상황은 더욱 악화됐으나 이들은 주 방위군에 의해 해산됐다. 폭동은 9일부터 소강세를 보였고 연방군은 12일 철수, 애그뉴 주지사는 14일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주 방위군을 철수시켰다.
한 주 동안 총 6명이 사망하고 7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000여 개의 상점이 피해를 봤다. 보고ㄷ한 방화 사례만 1200건, 체포된 사람은 5500명에 달했다. 체포 사유는 3488명이 통금 위반, 955명은 절도, 약탈 665명, 폭행 391명, 방화 5명으로 발표됐다. 피해액은 당시 기준 1350만 달러, 현재 기준으로 7900만 달러에 달했다.
볼티모어는 제2차세계대전 후부터 1968년까지 흑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백인 20만 명이 볼티모어를 떠난 대신 20만 명의 흑인이 전입했다. 1968년 볼티모어 인구는 90만 명 정도였으며 현재는 60만명으로 줄었다. 볼티모어시는 제조업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실업률과 빈곤율이 급증했었다. 한편 애그뉴 주지사는 1968년 리차드 닉슨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발탁, 1969~1973년까지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다.
김영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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