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광장] 한국선교 130주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허 종 욱/워싱턴침례대교수·사회학
한국기독교는 이날을 한국선교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두 선교사가 처음 밟은 조선 땅은 인천이 아니라 부산이다. 먼저 부산항에 내려 하룻밤을 묵은 뒤 인천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한국선교 103주년을 맞이해 분열돼 있는 한국기독교계가, 특히 한국선교계가 두 선교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인가를 반추해보는 것은 뜻이 깊다. 두 선교사가 보여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보다도 교파와 개인 인기를 초월한 협력선교다. 두 선교사는 서로 협력하여 교육선교를 통해 서양문물을 소개하고, 의료선교를 통해 질병을 퇴치했으며 교회설립을 통해 복음을 전파했다.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는 새문안교회를,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는 인천 내리교회와 정동교회를 세웠다. 이들 교회는 한국 초기 개신교회의 토대가 됐다. 또한 언더우드의 연희전문과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은 한국교육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이름 원두우로 널리 알려진 언더우드(1859-1916)는 1881년 뉴욕대와 1884년 뉴브런스위크신학교을 졸업했다. 그는 장로교 목사안수를 받고 인도선교를 위해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교지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아펜젤러(1858-1902)도 1878년 프랭크린 마샬대학과 1882년 드루 신학교를 졸업한 후 인도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역시 파울러 감독에 의해 선교지를 조선으로 옮겼다.
두 선교사가 왜 인도 대신 조선으로 왔는지는 그들의 선교 열매로 알 수 있다. 2만 명이 넘는 해외선교사를 파송, 3만여 명의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의 선교사 파송국이 된 한국은 인구비례로 따지면 제1선교사 파송국이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가장 기독교선교가 성공한 나라로 알려졌다. 근래에 개신교 인구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지만 선교 130년에 전체 인구 5200만 명의 20%인 1000여 만명이 개신교인이라는 기록은 세계 어느 기독교 선교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기적'이다. 인구비율로 아시아 최다 개신교 국가와 또 선교사 파송국이 된 한국 기독교지만 여러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느끼는 아쉬운 점은 협력선교의 미활성화인 것 같다.
더구나 많은 선교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치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대치관계는 교파와 파송교회, 파송선교기관, 개인의 업적중심에 따라 일어나고 있는 갈등을 말한다. 한국 선교 130주년을 맞이하면서 '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현재 두 선교사의 유해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한국 기독교는 두 분에게 너무 큰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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