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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⑧ 박정희와 존슨의 전략적 눈 맞춤…존슨 "전쟁 승패는 전장에서"…미군 파병 결정

전임 케네디 정책 이어가되 차별화로 베트남전쟁 선택
주적을 하나로 뭉친 공산세력으로 규정, 직접 싸우기로

1961년 11월 22일 아침. '창졸간'이란 표현이 정확하다. 어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급작스러운 순간 미국의 국정 책임자가 바뀌었다. 동시에 자유세계를 이끄는 지도자도 바뀌었다.

비극 속에 대통령직을 승계 한지 두 달. 존슨은 연방 상.하원의회 앞에 섰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첫 연두교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서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놓았을 것입니다(All that I have I would have given gladly not to be standing here today)."

이 말을 케네디에 대한 애도의 표현으로 분석하는 정치학자들도 있다. 제스처란 뜻이다. 경험과 역량으로 치면 존슨은 누가 봐도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의회민주주의 나라 미국에서 그만큼 의회 경험이 풍부한 정치인은 드물다. 상원 다수당 대표 시절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의원 케네디는 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고서라고 이 잔을 피하고 싶었다는 성서적 뉘앙스가 담긴 존슨의 고백은 정치적 수사만은 아니었다. 존슨은 분명 정치적 울렁거림을 겪고 있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직을 3년도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그를 사랑했다. 이성적 분별력에 기초한 존경심도 있었지만 케네디에게는 본능적 끌림이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 존경의 대상은 많다. 한 예로 링컨을 보자. 그의 영도력에 힘입어 두 개로 갈릴 뻔했던 미국은 하나로 존재한다. 그가 승리로 이끈 남북전쟁은 미국의 죄악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었다.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미국인들은 대부분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링컨을 꼽는다.

하지만 링컨은 살아생전 또는 오늘날에도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정적과 비판자에 둘러싸였었다.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 때문에 무시를 당했고 정치적 계산에 따른 조심스러운 행보 때문에 진보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미국은 결코 갈라질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남부에는 원수가 됐다.

케네디는 아니다. 거의 '아이돌' 수준의 사랑을 받았다. 정적 리처드 닉슨은 케네디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살았다. 'S&S' 때문이다. 케네디는 지도력의 실체(Substance)를 모양새(Style) 있게 역사에 남겼다. 베를린이 좋은 예다. 1963년 6월 케네디는 20세기 어둡고 아픈 역사의 대명사 베를린을 찾았다. 이 갈라진 도시 글자 그대로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케네디는 자유세계가 베를린을 버리지 않을 것을 확실히 해야 했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정책을 말하지 않았다. 군사력 강화를 선언하지도 않았다.

대신 케네디는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고 외쳤다. 미국의 대통령이 그가 대표하는 미국인이 베를린 시민이라면 그 도시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자신의 땅을 한 번도 그냥 내어준 역사가 없다. 꼭 싸움을 했다. 이렇게 함축적으로 미국의 비전을 힘차게 제시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존슨은 케네디로부터 그가 넘기에 버거운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미국사에서 세 명의 부통령이 유고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01년 9월에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1945년 4월의 해리 트루먼 그리고 1963년 11월의 린든 존슨. 이 셋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임자의 발자취가 컸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두 독자적 정책을 추진했고 전임자의 '클론'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직후가 중요하다. 전임자에 대한 애도가 깊은 마당에 자신의 정책적 비전을 너무 뚜렷이 제시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전임자의 족적 안에 머물면 그 또한 수렁이 된다. 정치 감각이 뛰어난 존슨은 투-트랙 방식을 택했다.

첫째 케네디가(家)에 대해서는 극적인 존경을 표시했다. 대통령이 살해되면 부통령은 수도 워싱턴DC로 급히 돌아오는 것이 상식이지만 존슨은 케네디의 시신을 남겨 놓고 갈 수 없다며 케네디가 죽은 달라스를 떠나지 않았다. 통치 공백을 막기 위한 대통령직 승계에 대해 존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조언을 구했다. 대통령 전용기에서 급하게 행해진 선서이었음에도 특별히 케네디가 임명한 연방 법원 판사 앞에서 했다.

남편의 암살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도 참석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존슨이 선서하는 동안 재클린 케네디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입고 서 있는 슬픈 장면이 만들어졌다. 워싱턴에 도착해서 존슨은 케네디의 시신과 재클린이 먼저 '에어포스 원'에서 내려오기 전 그 누구도 비행기를 떠날 수 없도록 명령한다. 존슨은 대통령이 된 후 곧 행정명령을 발동해 플로리다 Cape Canaveral을 케네디 스페이스 센터로 명명한다.

둘째 존슨은 케네디 정책을 이어 갈 것을 선언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1963년 말 자신의 정치적 한계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했다. "나는 유권자들로부터 통치권을 부여 받지 못했다."

존슨의 말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가 이제 대통령인 사실에 씁쓸해했고 또 어떤 이들은 감정적으로 도저히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케네디와 다른 길을 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케네디의 외교.군사.안보 정책의 삼두(三頭) 마차를 존슨은 그대로 끌고 갔다. 국무장관 러스크 국방장관 맥나마라 안보보좌관 번디를 "여러분을 임명한 케네디 대통령보다 내가 여러분을 더 필요로 한다"며 남아있게 했다.

그렇지만 존슨은 조용히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이 탈(脫)-케네디의 첫 무대였다. 그는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나라들을 미국처럼 만들기 위해 사용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된 후 그가 외교.군사.안보 라인에 제시한 정책 기조다. 저개발 신생국에게 잘 훈련된 게릴라와 싸우면서 동시에 민주체제와 경제발전을 이루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했다. 케네디의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에 대해서는 아시아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더 잘 알 것이라 했다. "한 주 만에 번영하는 20세기 현대 국가를 만들지 못해도 너무 비판하지 마라"는 것이 존슨의 결론이었다. 전장이 우선이란 뜻이다.

존슨의 생각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박정희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군인 박정희에게 전쟁의 승패는 전장에서 갈리는 것이었다. 또 호치민과 마오쩌둥이 적장이었다. 박정희는 공산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에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복제하려는 시도에 비판적이었다.

케네디는 아니었다. 월남 지도자들을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 독트린으로 설득하고 군대에는 전문성을 심어주면서 월남의 농부들에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면 미국의 간접 지원으로도 베트남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케네디는 베트콩에 대한 월맹의 조직적 지원을 인정하면서도 전쟁은 17도선 이남에서 월남군이 싸워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비정규전에 관한 훈련을 받은 한국의 100만 인적 자원을 베트남에서 활용하자는 제안을 고맙다며 옆으로 밀쳐놓았고 맥나마라는 이를 원조 미끼로 치부했다.

존슨은 머지않아 베트남 전쟁의 주적을 하나로 뭉친 공산세력으로 설정하고 대규모 미군의 파병을 결정한다. 존슨과 박정희는 전략적으로 눈이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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