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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 위해 미국에 남길 바란다"

[사람 속으로] 미 언론 집중 조명받는 추방위기 한인 입양인 아담 크랩서

가족의 소중함 내 처지 아니면 이해 못해
아이들 잘못될 경우 호소할 곳 전혀 없어
한국 소외계층 복지 시스템 창피한 수준
이 나라가 약속한 '가족' 꼭 지켜줬으면


"내 아이들만큼은 아버지 없이 자라지 않도록 무엇이든 할 테니 미국에 남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양부모들의 학대와 두 차례의 파양. 그로 인한 젊은 시절의 방황은 '전과자'라는 낙인으로 돌아왔고 결국 한국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아담 리처드 크랩서(한국이름 신송혁.40)가 지난 2일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이민법원에서 열린 추방재판 심리에서 판사에게 호소한 말이다.

〈본지 3월 16일자 A-1면>

기구한 인생이 뉴욕타임스와 AP 등 유력 언론을 통해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그는 추방재판 후로 미뤘다가 비로소 전화와 e메일을 통해 진행된 인터뷰에서 "내 자녀들에게 나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해 주는 것이 소망"이라고 밝혔다.

"입양된 이후 한 번도 미국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는 그는 "국제입양 제도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잘못될 경우 "아무 데도 호소할 곳이 없다"는 것이 이유.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다.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모국에 대한 궁금함은 있다"면서도 "미혼모를 비롯한 소외된 계층을 위한 사회복지 시스템은 창피한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은 물론 어릴 적 지냈던 보육원이나 생모에 대한 아무런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그는 "친누나(신송아)와는 내가 9살 때 누나가 10살 때 헤어졌다가 2012년에 처음으로 재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로 너무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서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지금의 가족은 소중하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입양인이 아니고서는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내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커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어 "미국은 나에게 가족을 약속했고 그래서 한국에서 보내졌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며 "내가 아니라면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약속을 지켜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신송혁이라는 이름은 낳아준 어머니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는 그는 공교롭게도 추방재판이 열렸던 4월 2일이 생일이다. 입양서류에 1975년생으로 출생지는 '미상'으로 나와 있다.

"두 번째 파양 후 절망…자살 결심 하기도"
노숙 생활 중 범죄로 징역형
출소 후 자립, 새로운 삶 시작
영주권 카드 재발급 신청 중
전과 드러나 추방재판 회부


미국서 발행된 출생증명서에는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지만 아마도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의 주소를 딴 것으로 추측된다.

세 살 무렵 친누나와 함께 제천어린이집으로 버려진 후 "누나와 함께 기독교 가정에 입양되는 것이 좋다"는 사회복지사의 판단에 따라 1979년 3월 8일 하와이주 호놀룰루로 입국한 다음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스티븐.주디스 라이트 부부에게 입양됐다. 이름도 아담 리처드 라이트로 바뀌었다.

그는 "라이트 가족은 루터란교 가정이었지만 가정 내 폭력이 심했다"며 "보육원이 훨씬 평화롭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집 맏아들이 아담의 누나를 성폭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11살 때인 1986년 라이트 가족은 이들을 파양하고 오리건주 아동서비스국에 의해 맡겼다. 약 18개월 동안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다 12살 때인 1987년 10월 오리건주 살렘의 토마스.돌리 크랩서 가족에게 입양됐다. 성은 1989년 다시 크랩서로 바뀌었다.

그는 "크랩서 가족과는 12살 때부터 살기 시작해 쫓겨날 때인 16살 때까지 함께 살았다"며 "입양 첫 날 이불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로 다음날 아침 '빅 레드'라고 불렀던 나무 몽둥이로 맞아야 했으며 이후 5년 동안 수시로 맞고 목 졸리는 등의 폭행은 일상이 됐다"고 회고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동안 교내에서 유일한 아시안이었다"는 그는 "학교에서도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밝혔다. 결국 14살 때 괴롭히던 상급생의 입에 주먹을 날렸고 정학을 당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갔을 때 그 학생은 친구 4명과 함께 아담을 때리기 위해 싸움을 걸었고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공구로 가격한 아담은 소년원에 가게 됐다.

1991년 6월 함께 지내던 입양아 중 한 명이 크랩서 가족의 행동을 친부모에게 알렸고 주정부의 조사가 시작돼 아담과 크랩서 부부의 친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동들을 그 집에서 데려갔다. 크랩서 부부는 강간 성적 학대 등 34개 항목으로 기소됐다. 크랩서 부부에 대한 기사는 아담의 학교 사물함에 도배됐고 결국 아담은 15세때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아담은 후에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학력을 취득했다.

크랩서 부부의 재판 당시 그는 "친누나를 다시 만나게 해 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부부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크랩서 부부는 12개의 중범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처벌은 구류 90일과 2년 보호관찰 그리고 약 5000달러의 벌금에 그쳤다.

16살이 되던 해 크랩서 부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 아담은 1년여를 차에서 자면서 홈리스처럼 지냈다고 했다. 그는 "이때 정말 심각하게 자살을 결심했다"며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18세가 될 무렵 그는 크랩서 가족의 집에 유리창을 깨고 침입했다. "한국의 고아원에서부터 가져온 고무신과 한글 성경책을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결국 반지 등의 귀중품이 없어졌다는 양모의 거짓 증언에 의해 1급 주택침입죄가 적용됐고 유죄를 인정하면 18개월 보호관찰로 끝날 것이라는 양부의 회유에 응했으나 두 차례의 소년 범죄 경력이 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25개월 징역형이었다.

그는 출소 후 두 번째 길거리 생활 도중 차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질러 다시 19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아담은 "두 번째 수감생활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며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교도소 내 미용학교에 등록해 기술을 배웠으며 출소 후 가게를 열고 처음으로 자립적 삶을 살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자동차 보험 산정 자격증을 따서 보험회사에서 일도 했고 미용학교도 졸업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15여 년에 걸친 요청에도 입양서류와 출생증명서를 주지 않던 크랩서 부부에게서 서류를 넘겨 받아 마침내 영주권 카드 재발급을 신청한 것이 2012년. 하지만 신원조회 과정에서 과거 전과가 드러났고 국토안보부는 그를 추방재판에 회부했다.

그는 현재 부인 앤 홍 구옌 큰 딸 크리스티나(5) 14개월 된 크리스탈-킴과 함께 워싱턴주 밴쿠버에서 살고 있으며 5월 12일에는 새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다.

2001년 전 부인과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도 있지만 함께 살지는 않고 있다.

박기수 기자

park.kiso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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