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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⑥속 시원한 답을 달라…박정희는 외교적 결례에도 '원조 확답'을 원했다

미 의회의 삭감 방침 알면서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케네디도 '핵우산' 내밀며 군축, 경제 올인 설득 나서

맥나마라는 박정희의 파격적 파병제안 뒤에 도사리고 있는 한국의 원조 요구를 보았다. 그가 나중에 한국군 파병이 큰돈 들어가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친 자체가 박정희의 집념과 집요함을 말해준다.

파병문제는 맥나마라와 상의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정희는 다시 경제.군사 원조 이슈를 꺼냈다. 박정희는 말 그대로 고장 난 전축이었다. 이에 더해 다시 돌아갈 때 마다 볼륨이 더 높았다. 그는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러스크를 위시한 케네디 측근들로부터 미 의회의 해외원조 삭감과 재조정 요구에 대해 여러 번 설명을 들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정상회담은 공동선언까지도 사전 동의를 한다. 만나기도 전에 합의내용이 정해진다. 또 사전 조율을 통해 회담을 경직시킬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없앤다.

박정희는 자신의 요구에 대한 케네디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물고 늘어졌다. 새로운 원조 방침을 모두 재고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한국에 중요한 부분에는 예외 조항을 둘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이 순간 차트의 귀재다웠다. 5.16 전후를 비교해 그간 혁명정부의 성과를 설명하는 일종의 증빙 서류를 만들어왔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케네디도 작심하고 설득전을 펼친 사실이 대화기록의 행간에서 읽혀진다. 'President went into some further details'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재정문제를 조목조목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재정상황이 악화된 이유 중 하나는 인도차이나에서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을 썼기 때문이라 했다. 가볍게 표현해 앓는 소리를 한 것이다.



이때 케네디는 말의 톤을 바꾸어 한국이 얼마나 미국에 중요한 나라인가 토로하기 시작했다. 만약 한국이 공산화 되었다면 일본도 뒤따랐을 것이고 태평양 지역 전체가 공산세력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케네디는 이 소중한 한국을 위해 미국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옆의 맥나마라가 설명토록 했다. 다시 핵우산 얘기가 나올 것이 뻔했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박정희는 혁명정부는 물론 대한민국의 사활을 국방력강화와 경제개발에 걸었다. 이 둘은 상호보완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먼저 지금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는 60만 국군의 감축 가능성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장비와 국방예산을 지원하라. 이미 다 아는 박정희의 요구다. 미국의 입장은 여기에 반한다. 미국의 핵우산과 전시 개입 능력을 믿고 국군의 수를 줄이면 국방비를 경제발전에 투입할 수 있다는 거였다. 집은 지켜 줄 테니 나가서 일하라는 말이다.

맥나마라는 중요한 군사비밀이랄 것도 없는 수치들을 나열한 후 미국의 전체적인 군사적 능력은 공산세계에 비해 앞서있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핵능력은 수적으로는 3배에서 8배 질에서는 그 보다 더 앞서간다고 했다. 케네디가 마무리했다. 소련의 선제공격을 당해도 미국은 더 강력한 반격을 가할 수 있다!

국방장관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좀처럼 군사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국무장관 러스크까지 끼어들었다. 케네디의 발언을 되풀이하며 박정희가 그 뜻을 확실히 파악하길 바란다고 했다. 대통령 국방장관 국무장관이 하나가 되어 공산권을 초토화 시킬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을 믿고 한국군 감축 논의를 펜타곤에 맡기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한 원조에 관해서 케네디 백악관은 철옹성과 같았다. 박정희가 뚫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박정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케네디가 대화주제를 바꾸기 위해 북한 상황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자 또 한 번 원조 이슈를 꺼낼 기회를 만들었다. 기막힌 대화 전술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북한이 공업 천연자원 면에서 크게 앞서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후에도 한국의 전력 생산 능력은 현재의 북한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케네디가 해결책으로서 원자력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자 박정희는 재빨리 이를 원조 문제와 결부시켰다. 원자력 발전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하겠다면 고려하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발언이 겸연쩍었던 것 같다. 이 대목에서 그가 웃었다고 백악관은 기록하고 있다. 케네디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는 남북 간의 비교를 이어갔다. 공업화에 있어서 한국은 북한에 밀린다. 남북의 분단 대치상황에서는 경제력의 차이가 다른 부분에 영향을 준다. 케네디는 이 고장 난 전축 소리 같은 호소에 귀가 따가웠을 것이다. 군대는 건드리지 말고 경제는 키워달라는 요청에 대한 '긍정적 지원 (positive support)'을 위해 자신이 워싱턴에 온 것을 알아 달라고 박정희는 말했다. 이어 그의 철저한 성격이 드러났다. 공동성명에 적힌 두루뭉술한 지지 재확인이 무엇을 뜻하나. 자신의 비전을 밀어주겠다는 거냐 아니냐.

러스크가 나섰다. 정확한 답을 원하는 박정희를 더욱 자극했을 것이 뻔하다. 미국은 자유진영의 전체적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 사회적 발전을 유도해야 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한미 양국의 전문가들이 다룰 것이다. 이제 그만하란 뜻이었다. 서울에서 실무자들이 할 일을 갖고 자유세계를 지키고 운영해야 하는 미국 대통령에게 달려와 매달리지 말라는 얘기로도 들린다.

박정희는 끝내 외교적 도박을 했다. 가슴에 한이 맺혔던 것 같다. 결례에 가까운 내지름이었다. 시간을 많이 빼앗았다고 예의를 갖추고 난 후 떠나기 전 원조 문제에 대한 'refreshing answer'를 들을 수 있냐고 물었다. 우리말로 '속 시원한 답'이라고 한 것 같다. 말을 돌리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다. 케네디의 답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이미 하겠다고 말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옳지 할 수 없는 것을 하겠다고 할 수는 없다.

이어 케네디가 위로의 뜻으로 한 말은 그렇지 않아도 실망한 박정희를 불쾌하게 했을 것이다. 세계 전체를 폭파해버리기에 충분한 핵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 "의장님에게 용기를 주었을 수도 있겠네요."라고 했다. 앞서 장황했던 맥나마라의 미국 핵전력 자랑을 상기시킨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병력 규모에서 시작되는 재래식 군사력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박정희에게는 동문서답이었다.

그럼에도 케네디는 박정희가 워싱턴까지 와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기분을 갖고 떠나길 바라지 않는다며 자신이 안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을 인식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재정악화 의회의 압박 인도차이나 등의 난제가 산적하니 미국을 이해하고 실망하지 말라는 거였다.

"내게 가장 시급한 일은(most urgent task)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at the same time)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방점은 '동시에'에 찍힌다. 도대체 몇 번인지 셀 수 없이 박정희가 외친 말이다. 하지만 백악관은 의전과 외교적 언어를 동원해 박정희의 호소를 피해갔다.

그래도 얻은 것이 있다. 두 가지다. 박정희의 집념만큼은 워싱턴의 그 많은 돌기둥처럼 케네디 정부의 의식 속에 굳게 세워놓았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박정희가 워싱턴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한국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외교의 펀더멘탈이었다. 이익.이득의 개념을 무색하게 하는 우정은 외교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방관계는 가능하다. 서로에게 줄 것이 있을 때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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