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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 한국 입국 130주년, 생가 첫 공개

“조선인도 빛과 자유를 누르게 하소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기도로 선교 시작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 인천 제물포 앞바다로 증기선 한 척이 들어왔다. 이 배에는 고종의 정식 허가를 받고 조선 땅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최초의 선교사들이 타고 있었다. 바로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사진)와 장로회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제물포 도착 즉시, 자신의 도착 사실을 본국(미국)에 알리면서 앞의 내용대로 이렇게 기도했다.
 
기막힌 우연이지만 올해 부활절도 4월 5일이다. 아펜젤로 선교사의 한국 입국 130주년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고향 생가를 한인 언론으로는 워싱턴 중앙일보가 처음으로 공개한다.
 


지난 26일 펜실베이니아주 벅스 카운티에 위치한 소더튼 지역.
 
필라델피아 북쪽에 위치한 소더튼은 볼티모어에서 차편으로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주택가 인근에 자리한 임마누엘 라이디스 교회. 평범한 모습이지만 이곳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으로 파송 받기 전 다닌 바로 그 교회다.
 
라이디스 교회는 아펜젤러가 태어난 1858년 건축됐다.
 
존 니더하우스 현 담임 목사는 아펜젤러의 숨결이 숨 쉬고 있는 교회라고 설명했다. 얼마 전에는 한국 감리교 충청연회가 이 교회를 찾아 아펜젤러를 기념하는 명패와 한국 민속품을 전달했다.
 
아펜젤러 생가는 엘리컷시티에 있는 베다니 한인교회 박대성 목사의 끈질긴 역사 찾기의 흔적이다. 교회까지는 그럭저럭 찾았지만, 생가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다 얼마 전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우연히 단서를 찾았다. 무덤 찾기 사이트에서 아펜젤러 부모(기드온 아펜젤러, 머리 아펜젤러)의 이름을 확인한 것이다. 이 교회 교인 중 1명이 올린 것이었다.
 
교회 묘지 내 부모의 묘비는 세월의 흔적으로 닳아 육안으로 글씨를 잘 볼 수 없지만 탁본을 뜰 경우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아펜젤러 생가는 교회에서 1마일 반경 안에 위치한다. 박 목사 일행은 26일 방문길에 직접 생가까지 확인했다. 낯선 동양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집주인 마커스 로젠버그 씨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는 80년대 후반 대니얼 데이비스라는 이가 아펜젤러 관련 논문을 쓰면서 자신을 방문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그가 이곳이 아펜젤러 선교사가 태어난 곳이었다고 말해 자신도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아펜젤러 생가는 이후 증축했지만, 벽면에 ‘1860’이라는 년도 표시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로젠버그 씨는 “생가가 공개되면 선교 여행지처럼 누군가의 발길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감을 표시하며 “되도록 평화로운 일상을 깨지 말아 줄 것”을 당부했다.
 
박대성 목사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보자는 의미”라면서 “선교 열정으로 미지의 나라에서 희생하고 헌신한 아펜젤러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도 지금이시대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아펜젤러 생가를 찾는 데 앞장선 박 목사는 이미 3차례에 걸쳐 아펜젤러의 유물과 유품, 초기 기독교 감리교 유물 등 수백 점을 대한기독교감리회 충청연회 및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에 기증했다.
 
그는 특히 한국에서 열리는 아펜젤러 선교사 13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 볼티모어에 위치한 미 감리교 어머니 교회인 러브리 레인 교회에서 아펜젤러 파송에 도움을 준 가우처 박사의 진품 일기(1907년)등을 수집해 이번 주 한국으로 간다. 가우처 박사의 진품 일기는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옆에 건설 중인 가우처 홀에 전시된다.
 
허태준 기자
 

 ☞아펜젤러 선교사는 누구?
 -1858년 펜실베이니아 소더튼에서 태어났다. 1882년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를 졸업한 뒤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884년 미감리교 선교 위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8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했다.
 
그해 4월 5일 부활절 오후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으로 입국한 그는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내리교회 창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학문에 뜻을 둔 그는 청년을 모아 교육 사업을 시작, 고종 황제는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는 조선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현 배재고등학교)이다.
 
성서 번역위원회의 회원으로 조선의 성경을 번역하여 만드는 일에 적극 참여한 그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 전·후서 번역을 완성했다.
 
아펜젤러는 44세가 되던 1902년 제물포에서 출발, 전라남도 목포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서북방 2~3해리 지역에서 일본 선박과 충돌,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했다.
 
시신은 찾지 못했으며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아펜젤러의 묘지는 가묘이다. 그의 자녀인 엘리스와 헨리도 조선에서 아버지가 못다 이룬 선교, 교육 사업을 계승한 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한국 최초의 성경 전래지로, 특히 아펜젤러 선교사가 순직한 충남 서천군 마량리에는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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