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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④박정희 방미의 의미… 케네디의 원조 유지는 결국 '계산'이 깔려 있었다

쿠데타 악순환 피하려 경제·군사적 협력으로 '지지'
공산세력 마주한 한국땅에서 발 뺄 수도 없는 상황
박정희도 역설적인'미국에 기댄 자주권' 비전 제시

1961년 11월 박정희와 케네디 회담에 대해 혁명정부 관계자들은 물론 많은 역사가도 아주 후한 점수를 주어왔다. 5.16 이후 박정희에게 의구심이 들고 있던 케네디를 지지로 돌려놓고 지속적인 미국의 원조를 확보했다는 분석이다. 혁명정부는 박정희의 방미 성과를 정리한 홍보 책자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야 한다. 박정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미국은 어떤 선물을 그에게 안겼는가.

주한 미국대사 새뮤얼 버거의 표현이 가장 정확했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우호적(friendly)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박정희와 케네디의 만남은 반세기가 지났다. 그 세월은 미국 대통령과 같이 식사하고 사진 찍고 두리뭉실한 표현들로 채워진 공동성명을 획기적 성과로 포장하는 의식구조에서 떨쳐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박정희의 워싱턴 방문은 상징성에서는 성공 실질적 성취에서는 실망이다. 박정희를 맞이하기 위해 부통령 린든 존슨이 공항에 나왔다. 백악관에서 세 차례나 케네디와 만났다. 미국은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경제원조와 협력을 계속 제공할 것을 확약했고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처하는 공동 이익을 인정하여 군사원조를 제공할 것도 재확인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외형적 환대 추상적 지원 약속을 위해 워싱턴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는 아주 구체적인 지도자였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24억 달러가 들어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과 60만 한국군의 감축 논의를 종식하고 전력증강을 위한 지원을 하겠다는 글자 그대로 '확약'을 받고 싶었다. 박정희는 확신했다. 이 지원은 한국을 위한 미국의 은혜가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장기적 투자이다. 박정희의 비전을 미국이 어느 정도 수용했나를 따져야 한다.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준 선물은 있다. 혁명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한국에 대해 계속 지원할 것은 확실히 했다. 하지만 이것을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안겨준 특별한 선물이라 말할 수 없다. 5.16은 이미 기정사실이고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지도자였다. 케네디가 혁명정부에 대해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다 해서 원조를 중단하거나 규모를 갑자기 줄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것은 제 발등에 도끼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LA타임스의 표현이 정확하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은혜사관(恩惠史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미국은 우리를 지켜준 맹방이라고 시작되는 대미 역사관을 말한다. 미국은 한국을 보호하면서 미국의 이익을 지켰다. 물론 엄청난 희생을 치른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전후 미국은 아시아에서 세 개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첫째는 공산화된 세계 인구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전쟁으로 무너져 내린 일본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셋째가 동남아에서 일고 있는 반제국주의 투쟁에 대항하는 일이었다. 미국이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한국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한국은 자유진영의 방어벽이고 전초기지이다. 케네디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의 표현대로 한국은 대륙 공산 세력의 심장을 향해 있는 칼끝이다. 이 칼끝을 지키자고 미국은 3만3000의 생명을 6.25전쟁에서 잃었다. 대한 원조만 30억 달러. 60년대 초 한국에 6만 명 가까운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미국이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아시아의 최대 요충지가 한국이다.

박정희의 한국 스스로 이 칼을 더 단단하고 뾰족하게 하기 위해 담금질하고 날을 세워야 한다고 외쳤다. 군인 박정희가 미국의 핵 능력을 모를 리 없다. 미국의 핵우산이 초강력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한국은 그 우산 밑에서 안주할 상황이 아니었다. 미국의 핵이 무서워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할 북한이 아닌 것은 지금이나 반세기 전이나 마찬가지이다. 지독한 아이러니로 들리지만 일단 미국에 의지해 나라의 자주권을 찾겠다는 것이 박정희의 비전이었다. 그래서 박정희에게 경제와 군사력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박정희 방문을 앞두고 케네디 정부는 미국이 원하는 바를 목록별로 정리했다. 비밀문서였다. 첫째가 박정희의 위상을 높여 주는 일이다. 타임지 표현으로 쓴 침을 삼키고 박정희에게 미소를 보였다. 박정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다. 박정희는 한국에 변화를 가져오고 미국의 이익을 지켜줄 리더이다. 그만한 소양과 성향을 가진 리더가 미국의 가시권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를 지지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그에 대한 잠재적 도전세력이 약화할 것이고 미국이 가장 두려워한 쿠데타가 또 다른 쿠데타를 불러오는 악순환을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교훈을 돌아보면 된다.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결정적 실책은 월남 군부가 쿠데타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끝내 미국 스스로 세워놓고 지지해온 고 딘 디엠 대통령마저도 쿠데타군에 의해 처형되도록 내버려뒀다. 그 후로 미국은 호치민의 영도 아래 똘똘 뭉친 월맹을 쿠데타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그대로인 월남 군부를 앞세워 싸우려 했다. 어쨌든 미국의 첫 번째 목표는 쿠데타 없는 한국이었다.

박정희가 곧 대면할 케네디는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묻지 말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라고 외쳤던 인물이다. 미국에 손 벌릴 생각만 하지 말고 미국이 이끌고 있는 자유세계에 보탬이 돼 달라는 얘기였다.

이미 시나리오에 있었다. 박정희에게 미국은 의회민주주의 나라인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의회는 국민과 유권자의 생각과 판단에 민감해야 한다. 미국의 대한 원조도 의회가 정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으려면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실제적인 경제 사회적 개혁을 통해 미국인과 의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쿠데타를 정국불안의 산물과 원천으로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판단에 한국에 줄 수 있는 원조가 직결되어 있다는 애기다. 어느 쪽으로 보나 박정희에게 케네디는 힘든 대화 상대였다.

또 케네디의 보좌관들은 박정희가 사사건건 백악관과 직접 상대하려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대사를 위시한 주한 미국 관리들이 백악관이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주요한 역할(key role)'을 하고 있음은 강조하라 했다. 풀이하면 혁명정부를 매일 가까이서 상대하고 평가하는 주한 미국대사관의 판단에 따를 것이니 잘 알아서 하라는 메시지다. 박정희에게 아주 민감한 부분이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비판적이었던 사실은 나중에 이 지면에 설명될 것이다.

끝으로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미국의 힘과 능력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야 했다. 군사 교육과정을 밟기 위해 잠시 미국을 다녀간 것 외에는 미국과 관계가 없었던 박정희가 미국이 무엇을 할 수 있나 확실히 알아야 미국을 믿고 의지하며 따를 것이란 뜻으로 읽힌다.

굳이 박정희와 케네디 회담의 승자와 패자를 정한다면 워싱턴포스트의 관찰대로 비긴 게임이다. 동점도 예상 밖의 놀라운 성과다 하지만 발언 내용에서는 박정희가 이겼다. 구체적으로 많은 원조를 받아내서가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박정희의 생각은 정리됐고 말에는 호소력이 있었고 스타일에서는 집요했다. 외교적 결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원조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그에게 대한민국은 싸우며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박정희와 케네디의 한판 승부를 복기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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