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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맥 세상] '반퇴 시대' 한국 얘기만이 아니다

이원영/논설위원·기획특집부장

LA에 사는 40대 후반 후배 K가 겪은 에피소드다. 어느 날 부산에 있는 아버지가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식들을 다 소집했다. 이유는 몰랐다. K는 내심 아버지가 여든을 넘기셨으니 재산 정리를 미리 하시려나 생각했단다. 빠듯하게 살아온 K는 살짝 미소를 흘렸다. 기꺼이 부산으로 날아갔다. 형제들이 아버지 앞에 둘러 앉았다. 형제들의 표정을 보니 K와 비슷한 마음이 읽혔다.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지금 같아선 앞으로 20년을 더 살지도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너희에게 당장 줄 게 없으니 기대하지 말거라. 그리들 알고 각자 기대지 말고 알아서 살자."

K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런 에피소드는 100세 장수시대가 빚어낸 수많은 이야깃거리 중에 하나다.

중앙일보 본국지는 새해 들어 연중기획으로 '반퇴(半退) 시대'를 화두로 던졌다. 퇴직을 했지만 완전히 은퇴하지 못하는, 퇴직 후에도 여전히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알린다.

퇴직은 할 수밖에 없고, 살아야 할 날들은 수북하게 쌓여 있는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현명하고 능동적으로 새 시대에 대처하자는 것이 이 기획기사의 취지다.

5회에 걸친 장문의 기사를 읽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요지를 정리해본다.

한국 인구의 가장 많은 부분(14.3%)을 차지하는 1차 베이비부머(55~63년생) 세대는 710만 명에 달하는데 이들이 퇴직하기 시작했다. 인구 12.1%를 구성하는 2차 베이비부머(68~74년생) 세대의 퇴직도 뒤를 잇는다. '퇴직 쓰나미'가 앞으로 30년간 이어진다. 벌써 관청 재취업센터엔 50대 구직자가 북새통을 이룬다.

퇴직 후 30년은 더 살아야 하기에 노후 수입을 '가늘고 길게' 설계해야 하는데 그런 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다. 서울(수도권)의 집을 팔고 외곽(지방)으로 이주하는 것이 필수가 됐다. 60, 70대 나이에도 일할 수 있는 '경력 리모델링'을 하지 않으면 곤궁한 노년이 불가피하다. '반퇴 시대'에는 돈 뿐만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도 큰 과제다. 봉사나 취미생활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한국에서 나온 '반퇴 시대' 기사지만 미주 한인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다. 80세에 이르도록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던 어느 원로 인사 P는 활동을 접고 한적한 곳으로 이사한 뒤 대외접촉을 중단했다. 몇 달 후 그의 지인이 전한 말인 즉, P는 넘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 요즘 가장 힘들다고 한다. 집안 물건을 여기 놓았다가 다시 저기로 옮기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날도 많단다. 이렇듯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는 것도 노후에 닥칠 수 있는 고역 중 하나다.

건강한 노후생활에 관한 저술로 유명한 일본의 곤도 마코토(65) 박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예순을 넘기면서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부터 30년 후에 일본의 100세 이상 인구가 70만 명에 달할 것이란 기사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40년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기엔 너무 긴 시간이란 생각이 들면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은퇴 후 삶을 이렇게 조언한다. 이전의 지위나 자부심에 연연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건강 그 자체보다 계속 일(봉사)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고.

궁핍하지 않을 정도의 돈 관리,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에 대한 계획, 결국 돈.시간.건강은 노후 생활의 질을 결정짓는 키워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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