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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에서 이름은 '7104번' 서러워도 견더야 했죠"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 김성환·영자씨 부부, 윤성근씨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 이야기, 현실은 더 참혹
"그 시절 고됨은 약…후세가 제대로 알기 바랄 뿐"




한국에서 850만 관객의 눈시울을 적신 영화 '국제시장'. 6.25 후 파독 광부와 월남전 파병을 거치며 격변의 시대를 관통한 아버지의 희생을 그린 영화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로 서독에서 만나 결혼한 영화 속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와 영자(김윤진 분)의 삶은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만나 결혼한 동갑내기 부부 김성환 파독산업전사 뉴욕동우회 회장과 영자(74)씨 내외의 삶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이 뉴욕.뉴저지에서 개봉한 9일 김 회장 내외와 윤성근(75)씨를 만나 지난 세월을 되짚어 봤다.





# 국제시장 우리들의 이야기

영화 이야기부터 꺼냈다. 좌담회 전날 함께 시사회에 참석한 김성환.영자씨 내외와 윤성근씨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죠. 영화가 다 담아내지 못한 것도 많았어요. 1400미터 지하의 갱도는 스크린에 나온 모습보다 더 참혹했어요."

갱도에 내려가기 전 전원이 외치는 '글뤽 아우프'라는 구호는 '살아서 지상에서 만나자'는 일종의 기도였다. 104도(섭씨 40도)의 지열이 이글대는 지하에서 작업복은 아예 입고 내려갈 수가 없었다. 팬티 한 장 달랑 입고 수통 하나 차고 맨몸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온 몸에 탄가루가 박혀 곪아 터진 등에는 문신처럼 줄이 생겼다. 서독 함부른의 탄광에서 3년간 갱도를 뚫는 일을 했다는 김성환씨의 증언이다. 그 '계급장'이 50년의 세월이 지난 아직까지도 드문드문 남아 있다고 했다.

도르문트로 배치됐던 윤성근씨는 갱도에서도 가장 막다른 험난한 곳이라는 '막장' 일을 했다. 가로 80cm 높이40cm.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통로를 수십 미터는 더 내려가야 막장이 나왔다.

"거긴 진짜 지옥이었어요. 결혼해서 3개월 만에 죽은 동료도 있었고. 영화에서처럼 폭발 사고보다는 낙반 사고가 훨씬 많았어요. 돌에 깔려 죽어서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가기 전에는 우리가 가서 일이나 좀 돕고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파업도 해 봤는데 업무 개선이 되지 않은 채 일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위험'도 타성에 젖더라구요."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하루종일 빛이 없는 곳에서 일하다 정신이상으로 강제 귀국한 동료 사고를 피하지 못해 저세상으로 간 동료들의 모습 향수병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진짜 목이 메어서 애국가 1절을 끝까지 부르질 못했어요." 말하는 이들의 눈길이 허공을 더듬었다.



# 일에는 귀천이 없다

전쟁의 폐허에서 막 벗어난 한국은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지경이었다. 마침 공군을 제대한 김씨와 직장 생활 2개월차이던 윤씨에게 파독 광부 모집 광고가 번쩍 눈에 띄었다.

윤씨는 1964년 김씨는 1965년 각각 독일행을 택했다. '탄광' 일이라고는 전혀 몰랐던 이들이 서독에서는 하루 평균 8~14시간을 석탄가루를 마시며 일했지만 '한번도 처해진 상황을 한탄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어차피 3년이라는 시간이 끝나면 더 좋은 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이 거기에 있었어요. 어찌됐건 지금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김씨와 문씨가 입을 모았다.

"당신이 현재 구두닦이를 한다 해도 최선을 다해서 한다면 하늘은 당신을 영원히 구두닦이로 두지는 않는다"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말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는 김씨는 "이 나이까지 광부.택시운전.건물청소부 등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일을 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3년간의 광부 계약이 끝난 뒤 미국으로 건너온 김씨와 윤씨는 이제 넉넉할만큼 성공을 일궈냈다. 윤씨는 "7104번. 광부 시절 3년간 제 이름이었어요. 그게 서러울 때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생각했죠. '지하에서는 이름이 없지만 그렇다고 내 이름이 어디 가겠나. 견뎌내자'라고요."

1966년 뒤셀도르프 도르트문트 아펠라백 정신과 병원에 파견돼 일했던 김씨의 아내 영자씨도 이 말에 동감했다. "미국에 오니 독일에서 간호사들의 업무였던 시체 닦기 등은 다 간호사 보조가 하고 있더라구요. 그 시절의 고됨이 약이 됐어요."

이들은 뉴욕으로 건너온 뒤 또다시 이민 생활을 시작했지만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그저 감사했다고 했다. "어떤 허드렛일을 해도 하늘을 보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했다"는 윤씨의 말에 처연했을 당시 심정이 묻어났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고파

"한국 경부선을 파독 광부들이 깐 것이나 다름 없다." "한국 경제 발전의 초석을 일궈냈다"는 등 수많은 수식어가 이들의 공적을 기리지만 그렇다고 돌아가는 '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윤씨는 "수식어가 많으면 뭔가 대우나 혜택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지난 50년간 어떤 대통령도 정치인들도 아무도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마 요즘 젊은 세대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파독 광부가 뭔지도 몰랐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정부에 이제 와서 무슨 물질적 대가를 요구하거나 유공자를 시켜달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만이라도 기억되게 해 달라는 것 그게 우리의 바람"이라고 했다.

"벌써 50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많은 이들이 먼저 갔고 우리의 이야기도 희미해지겠죠. 하지만 이렇게 영화와 기사 자료 등으로 남겨지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은 아닐 거에요."

한국과 독일 미국에서 격변의 한 세대를 살아낸 이들의 눈가에 지난 기억이 어린다. 값어치를 따지기조차 어려운 묵직한 역사의 흔적이다.

황주영 기자/ sonojun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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