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산처럼 메운 570개 섬에 '… …'
차마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 절경 자랑
570개 섬이 빚은 절경은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 해방 직후 이곳을 찾은 시인 정지용(1902~1950)도 그래서 겸손했다.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정상 한편에 놓인 그의 시비에 적힌 기행문 '통영 5'중 한구절이다. 그 후 70년이 지났지만 감흥은 같다. 매일 최대 1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감탄한다.
지금 미륵산 정상의 절경은 누구에게나 가깝다. 10년 대공사 끝에 2008년 '한려수도 케이블카'가 세워지면서 왕래가 쉬워졌다.
케이블카는 친환경적이다. 1975m 국내 최장 케이블을 단 1개 버팀 기둥이 지탱한다. 나무 한그루도 쳐내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6년간 800만 명이 찾은 효자상품이 됐다. 시의 연간 순수익만 30억이다.
"환경 단체의 반발을 적극 수용했죠. 그래서 예술의 도시에 걸맞는 예술 케이블카가 만들어졌어요."
아침 찬공기속에 케이블카 첫 칸에 오르며 통영시 관광과 김용일 계장이 말했다.
케이블카는 산 위 자연이 빚은 예술과 산 아래 인간이 만든 예술을 잇는 '하늘 선'이다. 산 아래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과 음악가들이 나고 자라고 산 곳이다.
김 계장은 "'토영이야길'을 걸으면 왜 통영을 예술의 고장으로 부르는 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토영이야길은 통영의 사투리 토영과 언니를 부르는 '이야'가 합쳐진 말이다. 길은 강구안 골목부터 만난다. 불과 4블록 밖에 안 되는 좁은 골목은 해방과 전쟁으로 온통 어지러웠던 시절 예술의 산실이었다.
1952년 이중섭은 이곳에 와서 2년간 머물며 '소' 연작들을 탄생시켰다. '흰소', '황소', '부부' 등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이중섭은 이 골목의 '복자네 집'이란 술집에서 청마 유치환과 자주 술을 마셨다.
청마의 안주는 아마도 애끓는 사랑이었을 터다. 유부남이었던 청마는 1947년 이곳에서 스물아홉의 청상과부 이영도에 한눈에 반했다.
1967년 죽기 전까지 20년간 그는 이영도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시 '행복'에 등장하는 우체국도 토영이야길에 있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백석도 이 골목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앓았다. 그가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고 노래한 여인은 '난'이다. 난은 그의 절친한 친구 신현중과 결혼했다.
길에서는 윤이상도 만난다. 그를 기리는 기념공원 '도천테마파크'가 있다. 윤이상은 통영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음악은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박경리의 생가, 김춘수의 생가도 길 위에 있다. 박경리의 생가는 눈 앞에 두고도 찾기 힘들 정도로 소박하다. 예술과 일상이 이 길에서는 다르지 않다.
중앙시장 뒷편 언덕배기인 '동쪽 언덕' 동피랑에서는 지금의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들로 가득하다. 원래 공원 조성 계획으로 철거될 달동네였다. 하지만 2006년 11월에 '푸른통영21'이라는 시민단체가 나서서 벽화 공모전을 열면서 바닷가의 벽화마을로 다시 태어났다. 이젠 해외 예술가들까지 와서 벽에 그림을 그린다. 90여 개의 명작들이 동네 전체를 갤러리로 만들었다. 통영에선 누구나 문인이다. 장사도로 가는 유람선 송악산 1호 선상에서 김성덕(60) 선장은 통영 사람 김춘수의 꽃을 읊었다. 김 선장은 통영을 "내게로 와서 꽃이 된 바다"라고 했다.
통영은 떠나기 싫었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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