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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12월의 딜리터

김 애 리 / 수필가

요일에도 운명이 있나. 길고 지루한 월요일 형사를 은퇴한 탐정 구동치는 음습한 빌딩 4층 사무실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한다. 그는 의뢰인이 죽고 나면 살아생전 일기장이나 없애고 싶은 편지 온라인상에 노출된 각종 자료를 발췌하여 하드디스크의 개인 정보를 삭제해 주는 작업을 하는 '딜리터(Deleter)'다.

어느 날 살해당한 의뢰인의 딜리팅을 하다 사건에 휘말려들게 되며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린 작품 소설가 김중혁의 신작 장편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손에서 놓은 순간 흥미 있는 소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헌데 그 여운이 만만치 않다. 어쩌다 컴퓨터에 앉아 써서 보내려다 왠지 어리석은 것 같아 '딜리트(Delte)' 버튼을 누르게 되면 뜬금없이 이 소설이 떠오른다.

얼마 전 전화기 텍스트에 내 사진이 올라오고 전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포스트된 이 사진을 어떻게 지우는지 알 수 없어 무수한 버튼을 누르다 나도 소설처럼 젊은 딸아이를 딜리터(?)로 잠시 의지했던 기억이 나 실소하였다.

포스트 프라이버시. 다양한 채널에 알게 모르게 노출된 사진과 흘려 놓은 글들은 머리를 쭈삣 세울만큼 섬뜩하다. 만약 내가 죽게 되어 딜리팅를 의뢰한다면 '무엇'을 지울까. 그 '무엇'은 생각을 몰고 와 과거를 반성하고 오늘을 맑게 살아야 하는 조심으로 몸을 사리게 한다.



결국 작가는 소설의 매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유인으로 나라는 독자를 완전 제압하고 말았다.

나 어릴 때 지우는 작업은 태우는 것이었다. 처녀 시절에는 다락방이나 책상 구석 박스에 숨겨놓은 일기장이나 연애편지를 찾아내어 얼굴을 붉히며 성냥불로 부끄러운 마음을 태워버렸다. 종잇장 귀퉁이가 갈색으로 말려 올려가며 타들어 갈 때 펜으로 꾹꾹 눌러 써 놓은 애타던 감정이 함께 타버려 재로 변하던 그 아련한 연기의 냄새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슴에 묻으면 묻었지 결코 태운 것을 복귀할 수 없으니 깊게 숙고한 후 삭제의 결론을 내리던 그 시절의 안타까움의 책임의 무게를 기억한다.

허나 세월이 흘러 손가락 하나만으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가는 마음이 변하면 다시 톡 하고 누르면 재생버튼으로 감쪽같이 회복시키니 시대에 따른 가벼움이 나의 생각의 깊이의 경박함을 부채질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해 본다.

어찌 되었든 버리고 비우는 작업은 새로움을 향한 각성과 의지다. 매일 매일 버리며 살아왔다 해도 세월이 지나면 수북이 쌓인 타성들을 돌아보고 대청소를 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12월 중순 회색빛으로 침울하더니 겨울비가 내리고 날씨가 차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중간세대 누군가의 말처럼 아나지털(Analgital)세대인 나는 지하실에 내려가 몇십 년 전 일기장을 모아 놓은 박스를 들고 오고 최근 컴퓨터의 글들을 정리하는 일에 하루를 보냈다.

1년을 정리한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욕심.교만.질투.허영.집착에 매달렸던 부끄러운 순간의 기억들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태우고 지워낸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버리고 비워내는 어찌 보면 쓸데없는 이 단순한 작업이 이렇게 마음의 평정을 주는 줄 미처 몰랐다. 무엇보다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지반을 다지는 해맑은 기운을 온몸에 전달받는 기분이 느껴졌다.

설렘의 봄도 지나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속살을 태우던 여름의 열정도 지나가고 이제 내 나이 가을의 완숙함과 겨울의 침묵을 배우고 싶다. 그리하여 아주 단순하고 깔끔하게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잠시 고개를 들어 창을 내다 보니 비가 눈이 되어 내린다. 삭막하지만 포근한 평화롭게 겨울눈 내리는 밤 새 날을 기약한 12월의 딜리터 손이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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