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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이철수 사건'의 이민사적 교훈

장 태 한 /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

이철수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인 62세로 일생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민자로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으며 석방 후 불우한 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990년 이후 미국에 이민 오신 분들에게 이철수라는 이름은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 초 이철수는 한인사회는 물론 아시안아메리칸 민권운동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1964년 12살 때 홀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영어가 미숙하고 문화 차이로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방황하던 그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갱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대낮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어이없게 한인 이철수가 용의자로 체포된 것이다.

이철수는 변호사의 제대로 된 변호도 받지 못하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관광하던 백인들의 증언만으로 살인죄를 선고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1977년 감옥에서 백인 나치주의자이며 백인 우월주의자인 모리슨 니드햄은 칼로 이철수를 죽이려고 덤볐다. 순간적으로 칼을 빼았고 몸싸움 중 상대방을 찔렀다. 분명 정당방위였으나 오히려 특수살인죄가 적용되어 사형수 신세가 되었다. 당시 새크라멘토 유니온지 신문기자였던 이경원씨는 우연히 이 사건 일지를 보게 되었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파헤치기 시작했다. 끈질긴 취재로 이철수에게 억울한 살인죄가 적용됐다는 것을 믿게 된 이경원 기자는 이 사건을 세상에 알렸고 일본계와 중국계 필리핀계 그리고 한국계 2세들을 중심으로 이철수 구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구명위원회 결성은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아시안아메리칸 2세들이 단합하여 아시안아메리칸 민권운동을 전개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아시아계 2세들은 이철수씨 사건은 단순히 한인으로서 당한 피해가 아닌 아시안으로서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구명위원회를 조직하여 구명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1982년 9월 3일 이철수씨는 차이나타운 사건의 무죄를 선고받았고 그 다음해에 백인우월주의자 살인기도 혐의도 벗게 되어 드디어 감옥에서 석방되는 기쁨을 후원자들과 함께 누렸다.

아시안아메리칸 민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이철수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불우한 삶과 구명운동이 남긴 교훈을 2세들에게 전해야 한다. 또한 제2의 이철수가 나오지 않도록 한인사회는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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