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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이사하는 날

이사를 하다 보면 버리고 또 버려도 살림은 늘어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집사람은 마음이 바빠서 널려져 있는 옷이며 책 그리고 잡동사니를 보고 한숨을 팍팍 쉬지만, 짐을 싸면서 이것저것을 뒤적거리는 재미를 아는 사람은 압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을 찾기도 하고, 꽤 오래된 앨범 속에서 낯선 자기 얼굴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사 때마다 투덜거리면서도 버리지 못하던 책들을 이번에는 줄여 볼까 하며 만지작거리는데 책 사이에서 툭 하며 편지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예쁘게 접힌 편지를 주워 펴보니 삽 십 년이 훌쩍 지난 연애편지였습니다.

서울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온 편지는 말하기도 낯 간지러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매일 만나면서도 무슨 편지까지 이렇게 썼나 하는 생각에 낄낄거리는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아서 더 어색한 웃음이었습니다.

들뜬 마음에 남발했던 수많은 공약(?)들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고 부끄럽지만,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시간이 모두 현실이었다는 생각에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있었습니다.



손에 잡혔던 그 책 안에는 편지만이 아니라 그리운 가을도 들어있었습니다. 그 오랜 시간에도 빨간빛이 남아있는 손바닥 모양의 단풍잎이 함께 있었으니까요. 갑자기 서울의 시리던 가을 하늘이 보고 싶고, 노랗게 물들던 은행나무 잎들이 아른거렸습니다. 집 뒷산에 피어있던 코스모스, 소담스레 핀 국화가 뿜어내던 향기, 어깨를 부딪치며 걷던 붐비는 명동, 비원까지, 단풍잎 하나가 추억들을 길어올렸습니다.

무슨 추억 여행 같은 소리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몇 자 안 되는 편지와 단풍잎 하나도 다시 만나니 그리움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서는 행복을 느끼면서도 정작 단풍잎을 따서 책 속에 넣어 주고, 끙끙거리며 글자 하나를 만들어내던 사람을 이처럼 그리워하지 못했나 생각하니 어리석다는 말이 마음 한구석을 채웁니다.

문득 지나온 세월을 마음속에 길어 올려봅니다. 그리고 추억 속에 여기저기 묻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습니다. 내 인생의 책 속에 담겨 있는 셀 수조차 없는 단풍잎을 만져 봅니다.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쓰셨던 사랑의 편지를 다시 눈에 담으며 지나간 시간을 기억합니다.

자신을 찾으려고 방황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과 갈등, 성적, 시험, 대학 진학, 최루탄, 답이 나오지 않던 고민, 방황하며 알게 된 우정과 동지애들, 부르짖던 기도, 손때 묻던 성경책들이 하나로 묶여서 잔잔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지나가 버린듯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나는 너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사랑한다고 나를 그토록 그리워하신 하나님을 왜 이처럼 그리워하지 못했는지. 주시고 베푸신 사랑은 쏙쏙 빼먹고 추억도 남겼으면서, 그 시간을 만드셨던 하나님은 잊어버렸습니다.

가을을 주신 하나님, 오늘은 하나님을 죽도록 그리워하겠습니다.

한성윤 목사/ 나성남포교회
sunghan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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