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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 - LA 영사관 40년] '큰 한인사회'<대한민국 영토 10배 관할> 지원하는 '작은 한국정부'

워싱턴 주미대사관보다 일찍 설치
40년 전 10명에서 현재 50명 근무
민원 서비스는 날로 신속·간편화
한인사회 분란·불만 대처는 미흡

LA는 대한민국 외교사의 실질적인 시작이고 여전히 그 중심에 있다. 한국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그해 11월 LA에 재외공관으로는 처음으로 총영사관을 설치했다. 이는 워싱턴DC에 있는 주미대사관보다도 4개월이나 빠른 시작이었다. 당시 LA총영사관은 외교공관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지금도 대사급 인사가 총영사로 부임하고 지난 85년 전두환 전 대통령 이후 한국 정상의 방문이 줄곧 이뤄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개관 66년의 공관 변천사

시작은 초라했다. 다운타운 542 사우스 브로드웨이의 아케디아 빌딩 4층에 세든 총영사관은 말만 공관일 뿐 방 2개짜리 오퍼상 수준이었다. 광복 후 피폐한 조국의 현실은 아직 번듯한 외교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아픔은 한국전쟁 발발로 더욱 깊어졌다. 서너 명의 직원만으로 공관 명맥만 유지하던 총영사관은 1957년 윌셔와 코크란 코너에 있는 20층짜리 건물의 11층으로 이전한다. 지금도 LA한국문화원 인근에 있는 이 건물은 팔래비 정권의 압제를 피해 도망 나온 이란 사람이 소유한 것이었다.

총영사관이 공관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현재의 윌셔길 버몬트와 뉴햄프셔 사이에 있는 5층 청사로 이전하면서부터다. 한국 정부는 1988년 3월 주차장 부지를 포함한 건물을 500만 달러에 매입, 그해 10월 청사 이전을 완료했다. 이전 당시만 해도 1, 2층엔 가주외환은행(현 한미은행)이 있어, 출입문을 별도 사용하다가 2003년부터 공관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지은 지 60년 가까운 건물이라 재건축 필요성이 대두됐고, 2012년 기획재정부 해외재산관리팀이 실사 끝에 재건축 결정을 한 바 있다. 건축비용이 3000만 달러로 추산될 만큼 큰 공사라 예산확보가 미뤄지고 있지만 2~3년 내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동안 LA총영사관을 거쳐간 총영사만 19명이고 현 김현명 총영사가 20대째다. LA총영사 중 3대(1968~1972년) 노신영 총영사는 이후 국무총리까지 올라 가장 출세한 케이스로 꼽힌다. 획기적인 인물은 18대(2008-2011년) 김재수 총영사일 것이다. 김 총영사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시절 BBK사건을 변호한 인연으로 해외동포로는 첫 공관장에 올랐다.

▶영사 및 행정직 규모 증강

2014년 9월 현재 LA총영사관에는 총영사를 포함한 영사 21명과 행정직원 29명 등 총 50명이 다양한 공공외교 및 민원서비스를 하고 있다. 초대(1948-1960년) 민희식 총영사 시절 외교부 직원 서너 명으로 시작한 것에 비하면 10배 이상 커진 규모다. LA중앙일보가 창간한 1974년 당시에도 영사관 직원은 행정직까지 더해도 10명 수준이었다. 영사 파견이 크게 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이민이 본격화한 1970년대 이후부터다.

이민자 증가와 국력 신장 등으로 영사업무도 정무, 홍보, 검찰, 지자체, 법무, 관세 등으로 세분화하기 시작했다. 1980년 문화원, 2000년 교육원이 설치돼 총영사 지휘를 받게 된 것도 영사관 직원 수를 늘린 이유가 됐다. 부총영사 직제는 1980년 동포사회가 커지면서 업무를 전담할 외교부 내 중량급 인사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신설됐다. 국세영사, 홍보영사 자리가 폐지되기도 했지만 한미FTA 시행으로 2012년 관세영사 직이 부활했고, 2012년엔 개방형 공모제를 통한 부총영사가 처음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1990년 대 들며 부총영사가 2명으로 는 것은 영사관 내 별똥부대처럼 움직이는 국가정보원 담당 때문이다.

한편, 지난 2007년부터는 총영사관의 행정직원도 한국 채용의 원칙에서 현지채용으로 전환, 공관의 현지화를 통한 열린 공관을 지향하게 된다.

▶민원 업무 확대와 규모 확장

여권·비자 발급· 영사확인 등 기본적인 민원업무는 총영사관 초창기와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서비스 개선, 업무 전산화 등으로 업무는 더욱 세분화하고 늘어나고 있다. 여권업무도 2008년부터 전자여권제가 도입되면서 신속··간편·정확한 발급으로 민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12년부터는 가족관계증명서 발급이 시작돼 민원 편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동안은 한국의 친척이나 지인에게 의존하거나 영사관 접수시 수령까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으나 영사관에서 발급하게 되면서 일주일 내로 받을 수 있게 됐다. 올해 초부터 시행한 공인인증서 발급이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주민등록증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아이핀/마이핀 업무는 공관 개관 초창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외교 능력을 발휘해 불법체류 한인을 위한 신분증명서인 영사관ID를 발급하기 시작한 것은 LA총영사관이 이룬 쾌거다. 17대(2006-2008년) 최병효 총영사 시절인 2006년 총영사관은 LA시 및 카운티의 협조로 신분증명과 학교 등록, 은행계좌 개설에 사용할 수 있는 영사관ID 발급을 인정을 받았고, 타주 공관으로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찾아가는 민원서비스도 확대됐다. LA총영사관은 남가주를 비롯해 애리조나, 네다바, 뉴멕시코주를 관할지역으로 하는 만큼 원거리 거주자들은 영사관 방문을 위해 큰 맘 먹고 휴가까지 내야만 했다.

하지만, 9대(1985-1989년) 김기수 총영사 시절부터 오렌지카운티 순회영사를 시작한 후로 원거리까지 실시 지역과 횟수 등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오렌지카운티와 샌디에이고는 현재 주 1회까지 실시하고 있다. 한인들과의 소통을 늘리기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 외에 2011년부터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김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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