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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 - 미주 한인사회 40년]90’s, 흑인 폭동에 지진 덮쳐…찬호·세리 큰 위안

미국·한국 정계 진출 활발
소주, 비어&와인으로 분류

한ㆍ흑 마찰은 1990년 새해 벽두부터 뉴욕에서 시작됐다.

한인 장봉재씨의 잡화상 레드 애플을 찾은 한 흑인 여성이 바나나를 사려다 1달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업주 장씨와 직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사실과 달랐지만 ‘배고픈 흑인’들을 자극했고, 장씨 업소앞에 뛰쳐나온 흑인들은 ’흡혈귀‘ 등 원색적인 문구를 들고 무려 15개월간 불매운동을 벌였다.

뉴욕의 한흑갈등이 채 가시기도 전인 이듬해 3월16일 LA의 엠파이어 리커에서 업주 두순자씨가 오렌지주스를 훔치려던 흑인 소녀와 몸싸움을 벌이던 중 소녀를 총격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어 6월4일 존스 마켓 업주 박태삼씨가 쏜 총에 흑인 강도가 숨지면서 마찰은 확산됐다.



이듬해 4월29일 로드니킹을 구타한 백인경관 4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흑인들은 분노의 총구를 한인들에게 돌렸다. 이날 오후 5시 사우스LA 플로렌스와 놀만디 교차점의 탐스리커에서 시작된 약탈행위는 5월2일까지 나흘간 2300여 개 한인 업소에 3억 달러의 재산피해를 끼쳤다. 이재성군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다쳤다.

흉흉한 한인사회와 반대로 한국의 경제발전이 도드라지면서 이민자 수는 급감했다. 1993년 27년만에 처음으로 이민자수는 1만명 아래로 떨어졌다.

잿더미에서 재기의 안간힘을 쏟은 지 2년, LA한인사회에 다시 재앙이 찾아왔다. 1994년 1월17일 노스리지 강진이 발생했다. 이필순, 하워드 리 씨등 한인 3명을 포함해 61명이 숨졌다.

슬픈 소식이 계속되던 시기, 박찬호와 박세리의 활약은 한인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1994년 1월11일 계약금 120만 달러에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96년 5승을 거두며 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자릿수 승리를 거뒀다. 박세리는 98년 한해에만 5월 맥도널드 챔피언십 우승, US 오픈 최연소 우승 등 4관왕을 거머쥐었고, ‘올해의 최우수 여자선수’에까지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한인들의 미국과 한국 정계 진출도 활발해진 시기다. 특히 1992년 11월4일에는 김창준 연방 하원의원, 임용근 오리건주 상원의원, 신호범 워싱턴주 하원의원, 재키 영 하와이주 하원의원, 정호영 가든그로브 시의원이 연달아 당선됐다.

98년 10월24일엔 고홍주 예일대 교수가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 임명됐다.

한국 정치권에서도 낭보가 이어졌다. 95년 6월27일 한국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유종근(전 뉴저지 주립대 교수)씨 김혁규(전 뉴욕 한인회장)씨가 각각 전북, 경북 도지사에 당선됐다. 이듬해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한길(전국구) 등 재미 한인 6명이 국회로 진출했다.

98년 7월 피트 윌슨 주지사 서명으로 서민의 술인 소주가 하드리커에서 비어&와인으로 분류돼 요식업계의 오랜 숙원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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