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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 - 미주 한인사회 40년]80’s, LA서도 민주화 항쟁…사회단체 잇따라 창립

두차례 올림픽 후원 물결
북한과의 교류 물꼬 터져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LA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21일에는 LA 한인들이 총영사관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같은 날 남가주 총대학생회, 한인 목사회가 구국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백악관에 ‘광주사태 규탄 편지 보내기 운동’도 확산됐다. 군부정권에 대한 반발은 이듬해 전두환 대통령 방미 규탄 총궐기대회로 이어졌다. 1982년 12월엔 김대중이 2차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사회단체 활동 붐도 일었다. 1980년 남가주호남향우회(차종환 회장), 한인시민권자협회(소니아 석 회장)가 조직됐다. 이외에도 뉴욕한인의류협회, 해외한인무역협회(OCTA), LA평통(회장 문창배, 이상 1981년 창립), 미주한인상공인단체총연합회, 한미연합회(KAC, 이상 1983년) 등 현재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단체들이 잇따라 창립했다.

코리아타운 이름 찾기도 80년대 이뤄졌다. 1981년 8월 톰 브래들리 당시 LA시장과 김명균 한인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올림픽과 버몬트 교차로에 코리아타운 표지판 제막식이 열렸다. 이듬해 1월12일엔 샌타모니카 10번 프리웨이 노먼디와 버몬트 애비뉴 출입구에도 각각 표지가 세워졌다.

1984년 LA올림픽을 위해선 한국선수단 한인후원회가 발족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 때엔 미주 한인 자원봉사자 160명이 고국에서 봉사했다. 후원회장은 이민휘씨였고, 자원봉사위원장은 김지수씨였다.

80년대 미주 한인사회의 또 다른 변화는 북한과의 접촉과 교류가 양성화되고 공식화됐다는 점이다.

1986년 2월10일 조국통일 북미주협회(LA대표 양은식)가 결성됐다. 같은 해 5월15일에는 최은희, 신상옥 부부가 북한 탈출 후 워싱턴 DC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2년 뒤에는 ‘미주이산가족 재회 위한 공동성명운동’이 벌어졌다. 또 전금여행사가 그해 11월까지 5차에 걸쳐 금강산 관광 및 북한 산업 사찰단을 모집했다. 12월에 언론인 민병용씨가 분단 이후 미주 기자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 취재했다.

이듬해 3월에는 LA 한인상공회의소(회장 이영송) 회원 14명이 평양을 찾았다. 8월 미정부는 한인의 고향방문 가족상봉 등 인도적 차원의 단체 방북을 허용했다.

그 밖에 80년대 뉴스로는 뉴욕발 서울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북해도에서 소련기에 의해 피격 추락(1983년 9월1일)됐고, LA총영사관이 현재 윌셔 건물로 이전(1988년)했다.

남가주한국학교가 가주정부로 부터 초등학교 설립 인가(1984년)를 얻어 윌셔가 건물과 부지를 구입했고 이듬해 미주내 한인이 세운 최초의 정규학교인 LA한국아카데미(이사장 김지수)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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