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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 -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 40년]20여개 한인 업소가 5000여개로 250배 껑충

1만명 인구는 12만여명으로
당시 한달 평균 50여명이 한국 방문
렌트비 300불, 2만여불이면 집 장만
거리서 한인 만나면 연락처 주고받아

강산이 4번 바뀐 세월. 미주 중앙일보가 이민 사회와 함께 성장해온 시간이다. 지난 40년전 북가주 한인들의 생활상은 어땠는지,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지역 올드 타이머들의 회고와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SF지역사업회가 펴낸 ‘샌프란시스코 한인 이민 100년’, SF한인센터의 ‘샌프란시스코 히스토리’ 등 자료를 통해 짚어봤다.

“7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지역 거리에 중국, 일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한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어요. 어쩌다 한인과 마주치면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했지요.”

1971년 샌프란시스코로 이민 와 뿌리를 내린 이돈응 전 SF한인회장의 회고다.
자료에 따르면 1973년 북가주 한인사회의 중심이었던 샌프란시스코 한인 인구는 2900명. 당시 산호세, 이스트베이, 새크라멘토와 몬트레이까지 합쳐 1만명 남짓한 한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는 1970년에 비해 3년만에 두배로 증가한 수치로, 새 이민법에 따라 70년대 중반부터 한인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센서스 집계에 따르면 북가주 한인 수는 80년대 3만여명으로 급성장 했고 실리콘밸리의 호황과 더불어 유입 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90년대 5만여명, 2000년대 7만을 거쳐 2010년대 8만3000여명에 이르렀다.

현재는 유학생, 지상사 근무자, 단기 체류자 등을 합쳐 12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지역 최초의 한인 여행사를 열고 현재까지 여행업을 하고 있는 이 전회장은 1974년도의 한국 왕복 항공료를 ‘620달러’로 정확하게 기억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도쿄를 경유해 한국으로 가는 노스웨스트 항공이었다. 당시 개솔린값이 갤런당 60여센트, SF의 2베드룸 렌트비가 300달러대, 주택값이 평균 2만5000달러 하던 시절이니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고객 대부분은 미군과 결혼한 군인 가족, 유학생, 미국 기업 근무자 등이었고 한달 평균 50장의 항공권이 팔렸다고 했다. 40년이 지난 현재,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UA·싱가폴항공 등 4개 항공사를 통해 하루 평균 1000여명의 한인들이 한국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실감나는 수치다.

40년전 샌프란시스코지역의 한인 식당은 ‘고려정’이 유일했고 한인 운영 업소는 소규모 그로서리나 잡화점 등 20여개가 전부였다.
한인 교회도 9개로 집계돼 있다.

2014년 중앙 한인 업소록에 등재된 한인 업소는 총 3500여개, 교회 수도 330여개에 이른다. 타민족을 상대로 하는 업소까지 포함하면 5000여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항공·군수산업체 로키드마틴에 근무한 남편 정기환씨를 따라 73년부터 서니베일에 거주하고 있는 정나미씨는 “당시 산호세지역은 온통 과수원 뿐이었다”며 “한식이 먹고 싶어 샌프란시스코까지 나가 중국·일본 마켓에서 장을 봐다가 김치를 담가먹고는 했다”고 회고했다.

정씨는 “주변에 사는 한인이 없어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가 전 교인인 20여명의 한인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덧붙엿다.
한인들이 많지 않아 외롭고 힘들기도 했지만 반대로 주류사회의 한인들에 대한 시각을 의식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76년 이민와 쿠퍼티노 고등학교에 다닌 김한일 치과병원 원장은 “당시 2000여명의 재학생중 한인은 나까지 2명뿐이었다”며 “이민 초기에는 덩치 큰 백인 학생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태권도 등 운동만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다 어느날 다른 한인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괜히 창피하기도 하고, 아버지(고 김진덕 전 미주 호남향우회장)는 내 뒷바라지를 위해 이민까지 와서 엄청 고생 하시는데,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같은 한인인데 하늘과 땅 차이로 비교되는게 싫어서’ 이를 악물고 공부에 매달렸다.
결국 두사람 모두 치과 의사가 됐다.

70년대 중반 이민 물결을 타고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지역으로 몰려 들었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새로 정착한 한인들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에 주유소 캐시어, 미국 식당 버스보이, 접시닦이, 청소 등 허드렛 일을 주로 했다. 그나마도 취직하기가 어려웠다. 이같은 수요에 힘입어 1974년, 김관희 현 SF노인회장 등 당시의 한인사회 리더들이 주축이 돼 초기 이민자들에게 영어와 직업 교육을 시키는 상항 인력 개발원(현 SF한인센터)이 설립되기도 했다.

1기생 15명을 뽑는데 104명이 지원, 당시 한인 이민자들의 직업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기록에 따르면 첫 해 60명이 교육을 받고 미국 회사 등지에 취직했으며 그 숫자는 점점 늘어 90년대 초에는 한해 900명에 육박하기도 했다.

올드타이머들은 한인사회에 갖가지 단체들이 생겨나고 구색을 갖추며 성장해 온데는 70년대초부터 시작된 신문, 잡지, 라디오, TV 등 한인 언론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입을 모은다.

언론을 통해 고국의 소식을 접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인사회 돌아가는 일들을 접하며 각종 단체, 학교 동창회, 향우회 등이 결성돼 한인들이 결집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현재 북가주에는 각 지역 한인회에서부터 각종 동우회, 친목회에 이르기까지 300여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최광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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